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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는 사람 달인 김병만

문화
종합

[최보식이 만난 사람] 몸 개그의 '달인' 김병만

  • 입력 : 2011.01.24 03:14 / 수정 : 2011.01.24 04:07

"저는 남의 실패에서 배워… 맛있다는 음식점엔 잘 안가"
작은 키가 콤플렉스 만원버스로 통학 때 사람들 가슴 사이에 얼굴 눌려
고교 졸업 후 취업 30만원 들고 상경해 8번 만에 개그맨 시험 합격

“제가 어려운 묘기를 하면 관객들은 조마조마하죠. 그때 툭 던집니다. ‘여러분들은 긴장하지 마시라. 긴장은 저만 하면 됩니다.’ 한마디에 웃음이 터집니다. ‘아아~ 하고 마음 졸이면 코미디 프로가 진지한 프로가 됩니다. 와~ 하고 박수 쳐주셔야죠.’ 저는 관객들 심리가 어떨까를 생각합니다.”

김병만(35)씨의 말문이 열린 것은 인터뷰가 좀 진행된 뒤였다.

개그 콘서트 한장면
그는 KBS 개그콘서트 '달인'에 나오는 체육복 차림이 아니라 더블 버튼 재킷에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당초 신문사로 들어올 때, 그는 굳어 있었다. 분위기가 낯설었을 것이다. 이러면 즐거운 시간이 안 된다. 나는 그에게 익숙한 것으로 시작했다.

"병만씨 키가 159㎝라고 들었어요. 사춘기 시절 콤플렉스가 없었나요?"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정확하게 158.7㎝입니다. 중학교 1년 때 139㎝…, 고3 때까지 계속 반에서 1번만 했어요. 콤플렉스가 심했지요. 집이 전북 완주군 시골이라 만원버스로 통학했는데 제 얼굴은 늘 사람들 가슴 사이에 눌려 갔어요. 한 번은 그게 싫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택시를 타고 간 적도 있었어요."

―친구들이 만만하게 안 봤나요?

"입학식 때마다 많이 싸웠어요. 키가 작으니 뒤통수를 때리고 심부름시키려고 하거든요. 이 때문에 운동을 더 열심히 했죠. 학교 3층 건물의 빗물관을 타고 내려오는 것도 보여줬어요. 발차기를 뽐내 '장클로드 반담' '손오공'이란 별명도 붙었죠."

―키가 컸더라면 삶의 진로가 바뀌었을까요?

"승부욕이 지금보다 없었을 겁니다. '너는 작으니까 빠져'라는 말을 많이 들었죠. 저도 할 수 있는데, 절대 꿀리고 싶지 않았죠. 내 책상을 교실 뒷자리로 갖고 가서 앉았어요. 키 크고 힘센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어요."

―공부는 못했고 관심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무단결석도 많이 했어요. '넌 커서 뭐가 될래' 소리를 많이 들었죠. 그러면 '난 평범하게 안 산다'고 큰소리쳤어요. 말만 그랬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주위 친구들을 잘 웃기기는 했지만 개그맨의 꿈은 꿀 수도 없었어요. 어차피 대학 진학 성적은 못 되고, 고3 때 직업훈련원에 들어갔어요. 공업용 배관 속에 들어가 용접하는 기술을 배웠어요. 빨리 기술을 배워 집안에 도움이 될 생각이었어요."

촌철(寸鐵)의 웃음판에서 그가 대세다. 작년 말 KBS 연예대상 발표가 있기 전 '김병만에게 대상을 주자'는 청원운동까지 벌어졌을 정도다. 그는 코미디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땀을 흘리며 어려운 도전을 '능청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2007년 말부터 매주 쉬지 않고 '달인'을 통해 그렇게 해왔다. 그가 만든 온갖 달인의 수는 220명이 넘는다.

―병만씨의 능청은 순발력인가요?

"대부분 연습입니다. 가령 과자를 탁구 라켓으로 쳐서 받아먹는 묘기를 선보이죠. 첫 번째는 성공합니다. 두 번째는 엉뚱한 방향으로 튑니다. 그러면 얼른 관객을 향해 '여러분도 하나 드시라'고 하죠. 이런 실패 상황까지 연습 때 대비해두죠. 가끔 전혀 예상 못한 실수도 나오죠. 한 번은 당황해서 애드립(즉흥적인 대사)을 하는데 더듬거렸어요. 관객들 반응이 없죠. 그때 '에이 한 번 웃겨보려고 했는데 더듬는 바람에 못 웃겼네'라고 치니 웃음이 빵 터졌어요. 관객들의 속마음이 그랬던 거죠."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내 심리가 어떨 것 같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가장 웃기기 힘든 자리는 사회적 지위가 높고 점잖은 남자 분들이 모여 있을 때입니다. 미소는 짓는데 그 이상 반응은 없어요."

―주로 몸으로 하는 개그인데 아직껏 안 써본 신체 부위는요?

"우리끼리는 팬티 속에 있는 것밖에 안 남았다고 말해요. 격파 시범은 엉덩이로도 해보였어요. 머리카락을 묶어서 격파해 보려고도 했는데 짧아서 그건 안 됐어요. 코와 눈도 다 써먹었어요. 아, 인중이 남아 있네요. 한때는 이렇게 앉아 있다가도 세 손가락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했어요. 관객들에게 먹힐 더 고난도를 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데, 몸무게가 10kg 더 쪘어요."

―한 배역을 오래 맡으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아닌가 돌아볼 때가 있겠지요?

"많은 분들이 제 프로를 좋아하고 기다려요. 그걸 아는데 어떻게 설렁설렁 할 수 있겠어요. 지난 회보다 이번 회에 더 웃겨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있어요. 연습 때 우리가 생각한 만큼 관객 반응이 없을 때도 있어요. 좀 섭섭하죠. 자신 없으면 녹화할 때 아예 두 작품을 준비하기도 해요. 현장 반응을 보고 그중 좋은 것을 택해 방영합니다."

―아이디어가 영 안 떠오를 수도 있지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진 않아요. 그렇게 막히면 매니저에게 '맥주와 소주를 사오라'고 합니다. 사무실에서 섞어 마시며 우스갯소리를 해요. '이런 달인이 어떨까?' 툭툭 던집니다. 가령 '16년간 신문지에서만 살아온 달인' 같은 걸 해보자는 식이죠. 지난번에는 후배가 '16년간 화장실 티슈를 입으로 불어서 한 번도 안 떨어뜨린 달인'을 해보자고 했어요. 그렇게 하려면 4~5분간 계속 불어야 해요. 실제 10번쯤 부니까 어지러워 서 있기도 힘들었어요. 별짓 다 해봅니다."

―그렇게 해서도 '달인'을 못 찾아내면 어떡하지요?

"날이 샐 때까지 회의를 합니다. 새벽 한두 시에 모일 때도 있어요. 수면시간은 불규칙해요. 4시간 이상 거의 자지 못해요. 이런저런 잡념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편이죠. 술기운을 빌려 자는 경우가 많아요. 어젯밤에도 잠이 안 와, 술 마시면 지장이 있을 것 같고 대신 책을 읽자고 마음먹었어요. 제겐 책도 수면제니까요. 읽다 보면 막 졸리는데 덮으면 또 딴생각이 나 뒤척거려요. 대신 차 안에서 잠깐씩 조는 게 꿀잠이에요. 습관이 되면서 크게 피곤하지는 않아요."

개그맨 김병만씨는 "학창 시절 '앞으로 넌 커서 뭐가 될래'라는 걱정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태경 기자 ecarco@chosun.com
―병만씨는 "주변 동료들을 보니 잠시 한눈팔았다가 추락하더라. 인기라는 게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순식간"이라고 말한 적 있지요?

"저는 잘 된 사람보다 주위의 실패를 통해 더 배워요. 올라오다가 툭 떨어진 선후배를 봅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저걸 조심해야지 하는 거죠. 제가 일찍 인기를 얻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겁니다. 긴 세월 고생해서 간신히 지금 이 자리까지 왔어요. 인기란 한순간에 잃을 수 있다는 걸 알아요. 한때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내가 뭘 잘못했지, 혹시 잘못한 게 있지 않나, 거리를 지나다가 침 뱉은 것이 트위터에 올라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린 적도 있었어요. 아직 총각이니까 아가씨에게 대시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고 나면 '내가 집적대는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예전에는 나이트클럽에도 갔지만 요즘엔 전혀 안 갑니다."

―이제 성인군자가 거의 다 됐군요.

"남의 눈을 많이 의식하게 된 거죠. 사람이 많거나 시빗거리가 있는 장소에는 가지 않아요. 그게 사고를 막는 길이죠. 저는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점에는 안 갑니다. 그런 데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혹시 취객이 '너 무술한다니 나와 한판 붙자'하면 충돌이 생겨요. 저도 술 마시면 흐트러지니까요. 한 번은 옆 자리의 20대 초반이 집적거렸어요. 무명 시절이었으면 불러서 귀뺨을 때려줬을 건데, 이제는 그쪽으로 쳐다보지도 않고 가능하면 빨리 일어섭니다. 맞아도 손해, 때려도 손해죠."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 같군요.

"부친의 병환으로 울적하게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행인이 '김병만 맞죠?'하며 같이 사진 찍자고 했어요. 활짝 웃을 수는 없잖아요. 나중에 인터넷에 '인상 쓰기의 달인'이라고 올렸어요. 함부로 슬퍼할 수도 없고, 표정 관리를 잘해야죠. 이 길을 택했으니 그걸 감수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개그맨이 되기로 정한 것은 고교 졸업 후 아파트 설비업체에서 일하고 있을 때다. TV에서 대학캠퍼스를 돌며 장기 자랑을 하는 프로그램에 그의 친구가 나왔다. 그 나이 때 반응은 그렇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웃기지도 못한 친구인데"라며 자존심이 상했다. 친구가 다니는 전문대학에 들어가면 개그맨이 되는 줄 알고, 거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기껏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됐구나, 그때 처음으로 비참한 기분이 들었어요. 다음 날 바로 직장을 그만뒀어요. 달랑 30만원과 연기학원 광고가 실린 신문조각을 들고 상경했어요."

―결단은 좋았지만 그 뒤 극단 연습생 생활을 하고 개그맨 시험에는 7번 낙방했다고 들었는데.

"연기학원 대표가 '너는 키가 너무 작아 방송하기에는 그러니 연극을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그 말이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어쨌든 연극 무대에서 4년, 매니저 생활도 1년 했어요. 그러면서 계속 개그맨 시험에는 도전했어요. 무대 울렁증이 심해 심사위원 앞에서는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어요. 방송국이 보이는 서울 대방동 옥탑방에서 살았는데, 시험에 떨어진 밤에는 방송국을 바라보며 '내 꼭 들어간다'고 엉엉 울었어요. 하지만 막상 시험 보러 가면 또 떨어졌어요. 8번 만에 붙었지요."

―무엇이 그리 절실했나요?

"저는 뭔가 해야 되겠다 생각하면 바로 하고, 안 맞으면 바로 관두는 스타일이에요. 조금 화나고 자존심 상하면 '에이 그만두면 되지' 했거든요. 고교 졸업 후 직장을 몇 군데 옮긴 것도 그랬어요. 하지만 개그맨 시험에는 떨어질수록 더욱 승부욕이 불탔어요. 평범한 삶으로 산다는 것이 싫었어요. 상경하면서 친구들에게 '개그맨 못 되면 난 죽어서 내려간다, 두고보라'고 큰소리쳤으니 그냥 내려가는 것도 창피했어요."

―병만씨는 "내가 쉬지 않아야 집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 적 있지요? 학창 시절 말썽을 피우던 아이가 이제 집안을 살리고 있군요.

"집안이 정말 어려웠어요. 아버지는 정부에서 빌려주는 영농자금으로 일을 벌이다 빚을 많이 졌어요. 지금은 병환 중이에요. 당시 어머니가 밭에서 기른 호박과 상추 등을 따와 읍내에 나와 팔기도 했어요. 한 번은 지나가는 나를 보고 반가워서 '병만아 여기다'하고 불렀어요. 저는 못 들은 척하고 빨리 지나갔어요. 그때는 그게 창피했어요."

―병만씨를 보면, 학창시절 공부 잘하고 못한 게 중요하지 않군요.

"저는 공부 안 한 걸 많이 후회해요. 공부를 했다면 제가 좀 더 지혜로웠지 않을까 생각해요."

―공부와 삶의 지혜가 상관 있다고 보나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저는 공부를 안 해봤으니까요. 공부해보면 그 답을 알겠죠."

그는 개그맨이 된 뒤 전문대에 들어갔고 4년제 대학에 편입을 했다. 요즘은 건국대 대학원 건축학과에 다니는 중이다.

바깥으로 나왔다. 무대에선 '16년간 추위를 못 느끼고 살아오신 오한 김병만 선생'이 추위에 움츠렸다. 사진기자가 "추워서 그러느냐, 한번 웃어보라"고 하자, "돈 받고 찍을 때면 아무리 추워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했다. 그는 웃는 쪽보다 웃기는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