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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여군의 수기-삼촌의 죽음을 보다.

개성시 장풍군에 살던 나의 삼촌은 X군단 32여단 경보병으로 있었다. 경보병은 기동타격을 위해 만든 북한의 특수부대이다.

엄마의 형제 중 막내였고 군 복무도 우리가 사는 집 근처에서 하면서 내가 학생 때도 자주 찾아왔었다.

32살에 제대된 뒤에는 농장 인삼분조에서 분조장(10~20명 작업단위 조장)을 하면서 살았다.

1992년도에 내가 제대된 뒤 한번 삼촌 집에 식량 구입차 갔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삼촌은 배낭에 옥수수를 가득 담아줄 정도로 살림이 괜찮았었다.

그 후로 삼촌에게 편지 몇 번 전하며 살다가 나도 살기 어려워 친척이니 뭐니 신경 쓸 사이가 없이 살게 됐다.

1994년 7월 어느 날.

장맛비로 물이 불어나 교통이 마비되어 집안에만 박혀 있는데 전보가 날아왔다.

삼촌네 집에서 온 전보인데, 내용은 삼촌이 사망 직전이라는 것이다.

그때 나는 황해도에 있는 오빠의 부대병원에서 일하던 때었다. 여행증을 신청했지만 개성은 승인번호가 떨어져야 갈 수 있는 지역이라 빨리 나오지 않았다.

날짜도 부족한데 여행증 나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37살밖에 안된 젊은 삼촌이 왜 사망 직전일까 하는 궁금증도 컸다.

어려서 부모를 일찍 여윈 우리 형제를 이모와 삼촌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돌봐주었는데.

황해도에서 새벽 5시에 떠나 저녁 9시가 되니 70리길 삼촌집에 당도했다.

캄캄한 밤에 비를 맞으며 들어선 삼촌네 집. 삼촌엄마가 울며 맨발로 달려 나왔고 애들이 어 엉엉 소리 내며 슬피 울고 서있다.

나는 삼촌이 죽었구나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역시나 삼촌이 보이질 않았다.

신발도 못 벗고 토방에 걸터앉아 삼촌 엄마앞에 마주 앉았다.

삼촌 엄마가 울먹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촌 작업반에 제대한 사람이 새로 들어왔는데 이 사람과 삼촌이 단짝이 되어 친하게 지냈다. 서로 전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내와 딸이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려 일도 못나가는 처지가 됐다.

어느 날 이 사람은 우리 삼촌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여보 게 병국아범, 우리색시 죽게 됐소.

어떻게 하겠소.. 딸년도 저러고 누워만 있지.

자꾸만 쌀밥에 고기국을 먹구 싶다네

어휴~고기를 어데서 구하겠나.

난 저 마누라랑 딸년이 죽으면 어이 살겠소.

불쌍해서 못 보겠소.

내일 당장 죽어도 원이 없게 고기 좀 먹고 싶다는데 어데서 구하면 좋겠나.

아무래두 며칠 못 갈 것 같소.

옛 전우에게서 이 말을 들은 삼촌은 며칠을 고민했다고 한다.

그땐 삼촌 가족도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돈도 없는 상태였다. 일년 가봐야 자전거 타고 군병원 한번 나가는 것밖에 외출할 일이 없이 농장에 갇혀 사는 그들에게 고기를 구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였다.

하지만 군대 생활을 오래 하면서 남에게 입에 들어간 것도 꺼내 주는 삼촌은 남의 고충을 듣고 고기를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고 한다.

산에 멧돼지 옹노도 놓아 보고 산토끼라고 잡으려고 애쓰고 했으나 허나 모두 허사였다.

그런 가운데 동료의 부인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지나가는 송아지를 보고는 소고기 생각이 난다고 소고기 무국을 한번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늘 입에 달고 산다고 한다.

그 말에 삼촌은 드디어 뭔가 결심하고 그 사람과 함께 송아지를 매놓는 들판으로 나갔다.

그리곤 송아지 한 마리에게 비료를 먹여 죽인 뒤 그 송아지를 둘러매고 산속에 들어가 잡았다. 처리할 만큼 고기 일부만 자루에 메고 내려오고 나머지는 거기에 묻어놓았다.

밤에 몰래 고기를 삶아 두 가족이 나누어 먹었다. 난생 처음 소고기라는 것을 먹어보는 두 가족은 너무 놀랐다.

가족이 고기를 어디서 얻었냐고 물으니 주변 군인들에게서 얻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두 가족은 이틀 동안 한 집에 모여 누구도 몰래 쇠고기를 먹었다.

그 사이 은근히 두렵고 떨린 삼촌은 혼자 몰래 송아지 도살한 자리에 찾아가서 흔적을 지우고 감쪽같이 정리했다.

그러나 그 작은 산골마을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송아지를 잃어먹은 관리인은 야단을 치며 신고를 했고 삼촌 엄마는 눈치를 채고 불안에 떨었다.

여보, 우리가 먹은 소고기가 혹시 그 집 송아지 아닙니까.

병국이 아부지 이제 어떻게 하겠소.

그럼 자수해 보세요. 하물며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자수하면 감옥은 가도 그래도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어서 가서 자수하세요.

안전부 보안원 자전거가 들락날락 거리는 걸 본 우리 삼촌은 올 것이 온 거라 생각하고 자기가족들을 위해 자수하였다.

드디어 삼촌집 가택수색이 진행되었다.

삼촌엄마도 까마득히 모르고 잇던 것들이 드러났다.

겨울김장독에 못 다 먹은 소고기가 소금이 뿌려진 채로 저장되었고 뼈 같은 것들은 변소 잿더미 무지에 파묻어버렸던 것이다.

이쪽 사람의 집도 수색했지만 이 모든 일은 삼촌이 계획적으로 저질러 놓은 일이라 그 집안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삼촌과 그 사람은 포승줄로 꽁꽁 묶여 호송차로 시안전부로 잡혀갔다.

삼촌엄마는 울며불며 어떻게 된 일인가 물어보지만 안전원들은 소를 죽였으니 당연하다면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렸다.

두 가족은 불안 속에 하루하루 보냈다. 그래도 설마 죽이기야 할까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몇 달 되도록 면회도 허용하지 않던 안전부에서 어느 날 통지서가 날아왔다.

땅에 묻을 때 입힐 수의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삼촌엄마는 본인이 자수한 일이라 감옥살이까지는 예상을 했지만 사형수들이 입는 수의복을 가져오라는 말에 너무 황당하여 친척집들에 전보를 쳤다.

내가 받은 전보가 그것이었다.

사형은 내가 도착한 날로부터 이틀 지나서 어느 장터 주변 강가에서 진행된다고 이미 포고문도 내붙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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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사람들은 사형수의 집안이라고 지나가며 돌을 던지고 나무 울바자까지 모두 뽑아갔으며 바람벽에 살인자의 집안이라며 낙서와 총살당하는 그림까지 그려놓았다.

삼촌은 사형을 받았지만 함께 잡혀간 그 사람은 직접 도살을 하지 않아서 20년 형을 받았다. 송아지 도살에 가담하고 은닉했다는 죄다.

북한에선 사람이 인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송아지가 인권을 가진다. 인권보다 송아지의 ‘인권’이 더 높다.

한국처럼 변호사를 찾을 수도 없고 법에 항소할 수도 없는 북한이다. 그냥 처형된다고 공개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다.

사형이 진행된다는 날 이틀을 울며불며 지내온 삼촌엄마는 그 사이 눈물 속에 지은 수의복과 맷돌을 돌려 까불린 찰조이밥과 고추 장아찌를 벤또에 싸들고 30리를 걸어 군 안전부로 나갔다.

도착했더니 사형시간이 오전 10시인데 인제 오냐며 꽥꽥 거렸다.

우리는 들어갈 수도 없다. 삼촌 엄마만 마지막 면회가 허용됐다.

가슴에 수의복과 마지막 밥으로 지은 찰조이밥을 안고 들어가는 삼촌엄마를 바라보니 너무 억이 막혀 우리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안전부 뒷마당에서 커다란 철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사형장으로 나갈 차들이 들락거렸다.

이 차들이 도 안전부에서 삼촌을 싣고 내려왔다고 한다.

한참 후 삼촌엄마가 안전원들에게 양팔을 매달려 거의 송장의 모습이 되여 끌려나왔다.

삼촌엄마 손에는 수의복은 없지만 밥보자기가 그냥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서 받아주지 않는 것 같다.

삼촌엄마는 더 말없이 빨리 장마당 강가로 나가자는 것이다.

우리도 아무 말 없이 삼촌엄마를 양팔에 끼고 걸어 나가니 벌써 사형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맨 앞자리에는 사형수 가족이 앉는 자리라고 공간을 비워 두었다.

사형장에는 사람 키 만한 십자형 나무판대기가 7대나 세워졌고 바로 그 밑에 구덩이가 파져 있었다.

끌려 나가다 시피 앞자리에 나가니 그 자리에는 사형하기 전에 남편에게 하라는 말이 종이에 써져 있었다. 이 종이를 이제 그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당신은 이런 죄 값을 받고 응당히 사형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이미 넋이 나간 삼촌 엄마는 37살에 총살당할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면서 손발을 떨며 흐느껴 울기만 한다.

10분전 10시.

저쪽에서 삼촌과 다른 사형수들을 싣고 오는 안전부의 포장을 친 차들이 달려왔다.

차에서 사형수들이 내렸는데, 이미 반죽음이 됐고 가족에 뼈만 남아서 걷지도 못하고 안전원들 양팔에 질질 끌려 온다.

내가 본 삼촌은 사람이 아니었다.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장작개비같이 마른 모습이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삼촌엄마도 소리도 못내고 흐느끼면서 애써 삼촌을 쳐다본다.

뒷켠 구석에서 그들의 입에 자갈을 물린다. 허튼 소리를 못하게 억지로 입에 자갈을 틀어박는 것이다.

다음 마스크를 눈 밑에까지 올라오게 씌우고 또 눈을 검은 천으로 둘러막았다.

그러더니 각자 이름이 적혀진 나무 말뚝에 한 명 씩 끌어와 묶어놓는다.

저 사람이 사람이더냐 우리 삼촌이더냐.

사형말뚝에 묶인 삼촌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고 숨은 막혔다. 그 심정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주 대롱대롱 힘없이 매달려 잇는 사형수들은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자는 사람, 아니 죽은 사람같이 서있다.

힘없이 꽂아놓은 막대기들이 연약한 무게들의 사람들을 너무 쉽게 지탱하고 있었다.

방송차가 앞자리에 밀고 들어온다. 그 뒤로 한국에서 은행의 돈을 나르는 차 같이 생긴 창문도 없는 시꺼먼 차가 또 들어왔다.

10시도 이미 지나 드디어 그 순간이 닥쳐온 듯싶다.

시꺼먼 차 안에서 무장한 안전원들이 얼굴을 가린 채 흰 장갑을 끼고 사형말뚝에서 약 30m 앞에 선다. 훗날 사형수 가족에게서 보복을 당할 우려 때문에 이들의 얼굴은 가리는 것이다.

방송차가 사형수들의 죄목을 한 명 씩 나열한다. 가족들은 울지도 부르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눈으로 식구를 쳐다볼 뿐이다.

마지막으로 가족이 해당 사형수에게 읽어주는 마지막 말 절차가 남았다.

눈물 흘리지 말고 말하라고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xxx

당신은 우리나라 사회주의 헌법을 몸으로 위반하며 나라와 인민의 재산인 소를 살인한 살인자다. 고마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당신은 자기가 한 죄 값을 만 사람들 앞에서 죽음으로 씻어야 한다.

우리 사회주의 헌법은 인민을 대표하는 법이기 때문에 당신의 죄를 용서 할 수 없으며 아내인 나도 함께 살아온 당신의 살인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죽음으로 법 앞에 나라와 인민 앞에 죄 값을 받기에 응당하니 인민의 총알을 받아 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이 사형수 남편에게 해야 하는 아내와 가족의 마지막 말이다.

사형수 일곱 명 중에 소 잡아먹은 사람이 두 명이고 한사람은 중앙당 간부에게 유언비어를 돌려서 정치적 손실을 받았다는 죄이다.

다른 한사람은 방직공장 지배인인데 경제범으로 잡혀왔다. 나머지 세 사람은 신의주에서 중국 사람을 통하여 남한 CD를 불법으로 사들여 은밀히 팔다 잡힌 사람들로 시범으로 공개처형에 걸렸다.

누군가 앞으로 나오더니 메가폰으로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형수들에게 돌맹이가 날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다 죽어있는 그 송장같은 사람들의 이마에서 피가 The아지고 코피가 쿨쿨 나온다.

메가폰이 소리친다.

인민의 이름으로 이자들을 처단한다!

사격준비!

연발로 쐇!~

따당따땅 소리와 함께 맥없이 걸려있던 사형수들의 머리가 뚝 떨어진다.

총을 쏜 안전원들이 자기 앞 사형수들에게 다가가 죽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는 다시 시꺼먼 차를 타고 어디론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죽은 우리 삼촌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래도 돌이 어데선가 날아온다.

잠시 후 늙은 사람들이 나와서 시체를 구덩이에 놓고 돌과 흙을 대충 뿌린 뒤 발로 꿍꿍 다져놓고 차를 타고 역시 사라졌다.

그제서야 삼촌 엄마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나도 오빠도 울기만 했다. 우리는 구덩이를 바라보면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었다.

사람들은 볼만한 구경이라도 한 듯이 방금 전의 사형장면 소감을 이야기 하면서 흩어져 가다가 일부는 우리에게 침을 뱉고 돌과 흙을 던지기도 했다.

자기도 불쌍하게 살면서도 남이 불쌍한 것은 못보고 살던 우리 삼촌이 사형까지 당해야 했었나.

조국과 인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젊은 청춘 13년 특수부대에서 복무했었지만 그런 경력은 송아지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허황된 것이었다.

삼촌의 사형을 보면서 우리 오빠도 삼촌 엄마도 그 사형집행자들과 안전부를 끝없이 미워하며 언젠가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꼭 복수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수하면 용서해준다는 기만으로 가득한 북한 법은 그것을 믿었던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총알의 희생양으로 깨끗하게 처리해버렸다.

지금도 질긴 목숨들이 이유 없는 사형을 기다리며 지옥에서 살고 있을 생각하니 가슴이 멍하다.

말없이 복수의 맘을 품어가는 북한 인민들에게는 꼭 원한의 대가를 받아낼 날이 올 것이다.

-이순실 전 북한군 간호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