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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6월18일 미탐방 구간 답사기 4-1 이화여고안 집중탐구

창덕여중 뒷담장을 보고, 또 그 보다 훨씬 오래전에는 토요일 오후던가

열려진 창덕여중 뒷문으로 들어가서 성곽흔적을 찾아 보니, 공사현장의

가림막이 막혀있어서 더 이상 못보고, 공사현장 철대문으로 들여다 보기만

하고 성곽돌들이 드러나 있는 것을 흥분된 가슴으로 보았던 것만 기억을

했고, 이화여고 안으로 들어가서 창덕여중 뒷담과 맞닿아 있는 곳을

샅샅이 확인하는 것은 한번도 하지 못한 것이 떠올라서 이화여고와 창덕여중의

담이 맞닿은 구간을 이화여고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찾아 보기로 하고

6월 26일 일요일날 망설이다가 이화여고로 향했다.

일요일은 문이 닫혀 있을 것이므로 경비실에 가서 자세하게 방문목적으르 얘기해야 하는데

오래 전에 정동쪽 후문으로 들어가려고 했더니 그 때가 토요일 수업끝난 시간이었는지

일요일이었는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머리 속에 일요일은 안된다고 거절당한

기억이 있어서 많이 망설였던 것이나 가만누워 있느니 운동삼아 나서보고

탐방취지 등을 설명하면 될 것도 같고, 비도 올 것 같은 날씨이고 하니

잘 봐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막상 가서 보니 경비실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굳이 계시냐고 소리쳐서 귀찮아 할지도 모르는 경비아저씨를 불러내서

방문목적을 설명했더니 마침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는데 같은 고향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더니 그냥 탐방객이라고 하니

"살펴보고 테니스장에도 발굴한다고 파헤쳐 놓았으니 가보라"고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나중에 구경끝나고 나올 때 보니 운동장에서 동네 주민이 아이하고 축구하고 있었다.

그만큼 외관상 별 수상한 것만 없으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듯 해서 괜히

지레 겁먹거나 귀찮아 하는 나 자신의 성격을 고쳐야 하겠다고 생각을 해보았다.

쉬운 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예전부터 지나치게 신중하여 시간을 많이 낭비했던

기억은 확실하니 문제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독립문에 내려서 이화여고 방면으로 가다가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천연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는 표석이 보였다.

영조 17년 1714년에 西池가에 지은 것으로 시인묵객의 놀이터였다.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인데 저 뒤에 창덕여중과 붙은 담장이 있어서

오늘 탐방의 목적이 저기에 있다.


뒷뜰에는 아주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창덕여중 뒷담에 서울성곽안내판도 보인다.


저 위 공사현장 가림철판있는 곳은 창덕여중 안에서도 막혀 있어 성곽흔적을 찾아서

따라가기 어렵다.


서울성곽 발굴을 위하여 공사현장은, 아래 사진 우측에 보이는 이화여고 본관밑 담장까지

샅샅이 조사한 흔적이 보인다.


이렇게 원형극장위의 담장을 따라서 성곽이 지나갔으리라.





오른 발견한 사실 하나. 저 앞 녹색으로 칠한 철문이 이화여고 남문인데 항상 저 너머에서

볼 때에는 이쪽이 도대체 뭔가 하고 궁금했었다. 그게 오늘 풀렸다.

배재공원에서 나오면 저 앞의 경찰 경비초소에 이르고 그 옆의 담너머로 이화여고

테니스장 서울성곽발굴현장을 들여다 보았었다.


테니스장 바닥 밑은 옛날에는 돌이었을 것 같은 모습이나 지금은 부스러지는 흙으로

변해 있다.

빨래터였을까? 물이 흐르는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군영지였는지 살림집이었는지 발굴조사단이 밝혀 낼 것이다.




담장밑의 일정폭을 조사한 것은 성곽기단석을 찾기 위함이었으리라.


순화동 재개발 구역안을 들여다 보면 멀리 평안교회와 그 뒤로 보이는 한양증권,

그리고 화면에는 안 보이나 교회 오른쪽에 동화약품이 있는데 축대를 조사해봐야 하지 않나?


이화여고 안 류관순기념관 옆의 나무에 붙은 경고문이 재미있다.

경사면이라서 학생들이 많이 미끄럼을 타는가 보다. 화초값에 심는 값도 물어내야 하고

벌도 선다고 협박이다.ㅎㅎ



중앙M&B건물을 포함한 축대들을 유심히 보라.


원래 여기 임시정부서울연통부(서울시청격) 자리는 숙종비 인현왕후께서 탄생하신 곳임.

동화약품 설립자의 아들 閔權이 서울연통부의 행정책임자셨는데독립운동중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연통부의 기능애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