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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란 이름의 유래(김효일님의 블로그에서 퍼온 글)

이 분도 여러 곳의 내용을 한꺼번에 옮겨 온 것인지, 내용이 중간에 보면 중복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고 그렇다.

서울이란 이름의 유래

첫번째:徐伐(서벌)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이 셔블로 불리고 이것을 한자로 서벌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서벌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가 우리말로 서울이 된 듯 합니다.


그 뒤에 신라에서 수도의 명칭을 '사로', '계림', '월성' 등에서
서라벌로 변경하기도 했으나 백성들은 이미 '서울' 이라는 말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 뒤에 고려에서 신라를 흡수하고 개성에 도읍을 정한 후 수도를 '개성부'라 했으나 역시 백성들은 개성이라고 하지 않고 서울이라고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로부터 수도를 서울이라고 부르게 된것입니다.

두번째: 요즘 인터넷이 발달하고 채팅문화가 발전하면서 경제적인 타수줄이기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단어를 줄여쓰곤 한다. 우리의 수도 "서울"조차도 줄여서 "설"이라 쓰곤 한다. 그런데 놀라운건 서울의 줄임 "설"이 "설(雪)"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이성계는 국사 무학대사를 보내 전국 여러곳에서 나라의 도읍을 물색하게 하였다. 계룡산 신도안을 적지로 여겨 기초역사를 시작했지만 땅이 비좁고 교역이 불편해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다시 전국 방방곡곡을 물색하던 무학대사는 남경(지금의 서울지방의 고려시대이름) 부근을 지나던 중 한 고승을 만나는데 무학대사는 한 눈에 이 승려가 비범하지 않다는 걸 알고 감히 조언을 구했다. 고승은 무학대사를 크게 꾸짖으며 "지금 네가 누워있는데 만큼 명당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둔한 후배여"라고 하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무학대사는 꿈을 꾸었고 꿈을 추스려보니 꿈에 본 고승은 다름아닌 고려 태조 왕건의 국사 도선대사였던 것이다. 그리곤 부근 인왕산에 올라 가만히 자신이 지쳐 잠을 자던 곳의 지세를 살피니 과연 천하 명당이었다. 때가 겨울에 다른 곳은 눈이 쌓여 있는데 오직 그곳만이 볕에 눈이 녹아 있던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에게 권하여 그곳에 장차 도읍할 성을 쌓게 했는데 무학대사가 말했던 눈(雪)이 녹은 가장자리를 따라 울타리 쌓은 것이었다. 눈울타리 즉, 설울서울이 된것이다. 이것이 600년 수도 서울의 지명유래인것이다.

서울시의 유래

증보문헌비고’에 서울의 한자 표기가 이렇게 수록돼 있다는 단서를 잡은 것은 조선 영조시대에 편찬된 유득공의 ‘21도 회고시’에 수록된 시를 통해서였다. 단군조선부터 고려 때까지의 고도(古都) 21곳을 시로 회고한 이 시집의 신라편에 수록된 작품 중 ‘진한(辰韓) 육부(六部)에 가을 연기 맑았으니/서울의 번화한 것 상상할 수 있다/만만파파(萬萬波波) 호(號)를 가한 피리/ 가로 불어 세 성이 일천년을 누렸다’란 대목을 발견한 것. 저자 유득공은 이 시를 노래한 후 ‘서울은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신라의 국호는 서야벌(徐倻伐)인데 후대 사람들이 경도를 말하려면

서벌(徐伐)이라 하여 차츰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라는 해제를 달아 놓았다.


1930년에 출간된 서울의 대표적인 지지인 ‘한경지략(漢京識略)’의 서울 연혁 부분에서

서울은 수도라는 뜻이고 신라 때의 서야벌, 서벌이 후에 차츰 변하여 서울이라 하였다’라는 대목을 발견, 학계에 보고했다.

또 한글학자이자 한글사전 편찬위원, 한글학회 이사를 지낸 이중화가 1918년 발간한 ‘경성기략(京城記略)’이란 저서의 1권에 ‘경성은 조선어에 서울이라 하니 경도, 즉 수도의 뜻이다.

서울은 신라의 방언으로 신라 시조 혁거세가 국호를 서라벌이라 하였더니 판도가 확장하여 국호를 개칭한 후 왕도의 명이 되어 서라벌 혹은 서야벌이라 하며, 서울이라 하니라’라는 기록도 발굴했다.

또 상해 임시정부 교과서로 사용하던 ‘배달족 역사’란 책 제4과의 서울 표기 사례, 1928년 발간된 백남신의 저서 ‘서울대관’의 서울 표기 사례, 지방 군지인 ‘옥천지(沃川誌)’의 서울 표기 사례, 이병기ㆍ백철공저인 ‘국문학전사’에도 ‘서울 ’을 이두로 썼다는 기록 등 수많은 증거를 발굴해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의 한자 표기가 ''로 공인받지 못한 이유는 이것이 ‘서완’(자완 완) 혹은 ‘서원’(쌓을 원)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 옥편이나 한자사전에는 ‘초두밑에 宛 ’이 ‘완’과 ‘원’과 함께 우거질 ‘울’로 읽힌다는 사실이 실려 있다.

‘서울’이란 한자 표기가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가 한강변에 도읍을 정한 후부터 500여년간 서울은 ‘한강의 북쪽’이란 뜻에서 ‘한양(漢陽)’이라 불러 왔고 구한말에는 청나라가 ‘한성(漢城)’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京城)’으로 바뀌었다가 1945년 광복 후부터 ‘서울’이란 지명을 되찾았지만 한자는 실종되고 말았다.

덕분에 한ㆍ중 수교 후에도 중국은 ‘한성’(현지 발음은 한청)으로, 일본은 ‘ソウル(소우루)’로 표기하는 등 혼란을 겪어 왔다. 한성이란 도시는 없지만 우리가 마땅한 표기법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은 ‘한성’으로 쓰고 있다. 덕분에 중국에서 보내는 우편물 중 서울대가 ‘한성대’로 둔갑, 서울대로 가야 할 것이 심심치 않게 한성대로 배달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청나라는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취급, 서울을 중국의 지방도시로 격을 낮추기 위해 한성이라 불렀다”고 말했다. 중국의 도시명 중 ‘성(城)’은 지방 도시를 의미하며 역사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도시는 북경, 남경 개경처럼 ‘경(京)’을 붙이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청나라의 지명 강등(降等)에 우리 국가 지도부가 이의제기를 하지 않아 중국은 오늘까지 ‘관습에 따라’ 서울을 ‘한성’으로 낮춰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 속에는 ‘한국은 중국의 속방국가’ 란 의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서울의 유래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은 한자어로 표기할 수 없는 순 우리말이다.

그래서 중국에선 이제까지 “서울”을 “서울”이라 부르지 못하고, 쓰지 못해서 “漢城” 이라 쓰고, 자기네 발음대로 “한청”이라 불렀는데 이제 와서 모순인걸 알았는지, 아집을 버렸는지, “首爾”로 쓰고 “서우얼”로 읽기로 했단다.


기록으로 보면 조선 숙종 때 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서울”이라는 말의 유래에 대해, 조선의 태조가 서울에 새로 터를 잡은 어느 날 눈이 많이 왔는데 울타리 모양으로 크게 쌓여 있어서 울타리를 따라 성을 쌓았는데, 눈을 뜻하는 “雪” 과 울타리의 뜻인 “울”, 그래서 “설울”이 부르기 쉽게 “서울”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는 조선을 개국하고 새로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새벌”에서 “서라벌”이 “서울”로 변했는데, 우리 고유의 말인“벌”과 “울”을 같은 뜻으로 본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서라벌”이 옛 신라의 수도였던 것과 관련지어 신라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수도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느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민족이 즐겨 사용해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중국을 상국으로 모시는 사대주의 국가였으니, 상국에서 발음하는 대로 쓸 수 없는 “서울”을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사용한 조선의 수도명칭은, 한성부(漢城府)나 한양(漢陽), 경조(京兆),경도(京都), 수선(首善), 장안(長安)등 다양하다. 그렇게 보면 아마도 글을 상용할 수 없었던 하급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쓰여 진 듯 하다.


“서울”이라는 명칭이 활발히 사용되기 시작한건 구한말 외국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게 되면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경성부(京城府)보다 일반인들이 널리 쓰며 영어표기가 쉬운“seoul"을 인쇄매체에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다.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수도의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해방 후 1946년 대외에 발표된 서울시헌장 1장1조에 “서울자유특별시”라고 명명함으로서 명실 공히 서울이 탄생 되었는데,이렇게 되기까지엔 사연이 많다.


해방 후 일제시대의 이름인 경성부를 그대로 쓸 수 없어서 새로이 수도의 이름을 정해야 하는데 의견이 분분 하였다한다.

옛 이름인 “한성부”를 다시 쓰자는 의견이 많았고, 일부에선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시”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한다.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형민(金炯敏)이 순 우리말인 “서울”로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한다.

그러니 수도의 이름이 “서울”로 된 것은 김형민의 공이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