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하러 간 사이에 조양은이 기습
이후 다시 상경한 조씨는 무교동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교동에서 호남주먹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오종철씨가 조씨를 형님으로 모시며 뒤를 돌봐줬다. 오씨를 비롯한 호남주먹들은 조씨가 염천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서울 주먹계에서 가장 센 조직은 신상사파였다.
“당시는 명동이 중심이었어요. 그때는 아직 호남세라는 게 없었습니다. 명동을 장악한 신상사는 이화룡의 직계였습니다. 서울에서 조직이라 할 만한 건 신상사파밖에 없었어요. 동대문도 서대문도 다 허물어진 상태였거든요. 신상사 이전 주먹들은 5·16을 기점으로 다 물러났습니다. 무교동에 오종철과 내가 있었고, 충무로 모 호텔을 근거지로 정종원 선배가 일정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 간 싸움이 있었을 뿐 조직 간 충돌은 없었습니다. 조직끼리 싸운 건 사보이호텔 사건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호남주먹들이 본격적으로 서울로 올라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조직 간 전쟁이 벌어졌지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보이호텔사건은 조양은씨를 주축으로 한 신진 호남세력이 사보이호텔에 있던 신상사파를 기습한 사건이다. 1975년 1월2일 발생한 이 사건은 주먹사에서 신상사파 몰락과 호남파 득세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조창조씨 얘기에 따르면 신상사파의 몰락이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신상사파의 아성에 금이 갔다’라는 정도의 표현이 어울릴 듯싶다.
사보이호텔사건의 시발점은 전남 해남(혹은 목포) 출신인 이경O이라는 호남주먹이 신상사파의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시비가 붙어 몰매를 맞은 일이었다. 그를 패는 데 앞장선 사람은 조씨와 같은 또래인 구달웅씨와 정경식씨였다. 정씨는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의 친구였다.
오종철씨의 친구인 이경O씨는 조씨를 형님으로 받들고 있었다. 당시 무교동에는 뒷날 김대중 정부 시절 주먹계 실세로 통한 정학모씨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이씨는 정씨가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다.
당시 무교동 조직의 서열은 조창조-정학모-오종철-은석-조양은 순이었다. 좌장은 오종철씨였고, 조양은씨가 행동대장 격이었다. 조창조씨는 “당시 양은이를 따르던 아우가 8명이었는데, 그 세력이 막강했다”고 회고했다.
“사건이 난 후 나는 이쪽과 저쪽(신상사파) 서로 10명씩 내세워 1대 1로 승부를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학모도 내 의견에 찬성했죠. 그런데 동생들이 ‘그런 건 옛날 방식’이라며 반대했어요. 결국 학모와 내가 목욕하러 간 사이 오종철과 조양은이 일을 저질렀던 겁니다. 실제 행동은 양은이가 했죠.”
조양은씨와 동생들은 명동 식구들이 신년하례차 모여 있는 사보이호텔 커피숍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몽둥이와 주먹을 휘둘렀다. 신상사의 처남 김수O씨가 중상을 입는 등 신상사파 조직원 몇 명이 다쳤다. 하지만 정작 신상사는 현장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화장실에 가 있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검사가 “공소시효 넘기라”고 조언
사보이호텔사건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지적에 대해 조씨는 “엄청난 과장이 있었다”라고 시인했다.
“사실 달걀로 바위치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요. 사보이호텔사건으로 신상사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신상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건이 나자 서울사람들의 응집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평상시 숨어 있던 신상사파의 방대한 세력이 드러났습니다. 힘으로도 돈으로도 백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양은이가 20대였습니다. 뭘 알겠습니까. 다만 총명하긴 했죠. 그 총명함이 그를 불행한 길로 이끌었지만. 태촌이는 양은이보다 나중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선배들한테 잘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이나 치부를 드러내기를 꺼린다. 더구나 ‘업무’ 특성상 자신의 실력이나 위상을 과시하는 데 익숙한 주먹들로서는 몹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씨는 감추지 않았다.
“동생들한테는 창피한 얘기지만, 사보이호텔사건이 나고 몇 년 지난 후 신상사 형님한테 항복하러 갔습니다. 주변에선 맞아죽을지 모른다고 걱정했어요. 사보이호텔에서 신상사를 만나 ‘죽을죄를 졌다’고 사죄했습니다. 그런데 신상사 형님은 ‘잘 찾아왔다. 없던 일로 하자’며 통 큰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은석과 양은이도 데리고 가서 사과시켰습니다.”
조씨를 비롯한 무교동 식구들은 사보이호텔사건 이후 수사기관에 쫓기는 몸이 됐다. 가장 먼저 체포된 정학모씨는 7개월간 형을 살다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사건이 난 지 3년쯤 지나 조씨는 서울지검 윤모 검사실을 찾았다. 윤 검사는 그와 동향인 평양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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