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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손의 최고수 조창조 이야기(2)- 퍼 온 글

대륜중·고의 전설적 ‘가다’

그가 다닌 대륜중학교는 사립치고는 ‘공부 좀 하는’ 학교였다. 입학경쟁률이 7대 1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싸움꾼인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전교생 중에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 잘하는 학생은, 일본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로 불렸다. 학교마다 ‘가다’가 있었다. 대륜중·고의 최고 ‘가다’였던 조씨는 어느 학교의 ‘가다’가 누구다, 혹은 누가 세다 하는 얘기가 들리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학교로 쳐들어가 상대를 불러내 운동장이든 뒷동산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움판을 벌였다. 패싸움은 없었고 전부 1대 1 맞짱이었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의 이름난 ‘가다’들이 모두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당시 대구는 유도와 씨름을 잘하기로 소문난 도시였다. 전국대회 우승자가 많이 나왔다. 운동을 잘해 조씨와 친하게 지냈던 몇몇 동급생은 뒷날 저명인사가 됐다. 유도에 능했던 전경환씨는 형이 대통령이 된 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으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 씨름을 잘했던 엄삼탁씨는 6공 때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다. 역시 씨름선수였던 김학룡씨는 뒷날 민속씨름 초대심판위원장과 일양약품 씨름단 감독으로 활약했다.

“엄삼탁, 전경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둘 다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매 좀 맞았죠. 체격만 컸지 싸움할 줄은 몰랐거든요.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싸움으로는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서 진 적은 없느냐”고 묻자 조씨는 허허 웃으며 “운이 좋았던 것 같다”라고 겸손해했다.

“애들 말이, 내가 진 적이 없다니까. 내가 싸움할 때마다 따라다닌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대구 통학권 내인 왜관과 김천, 경주 출신 학생들까지 잡았지요. 당시 칼을 쓰는 애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그 친구들은 따로 놀았어요. 나약한 애들이죠. 그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열외였죠.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조씨는 운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육상을 했고, 중·고등학생 때는 권투와 씨름, 유도를 배웠다. 도장에도 다녔지만 혼자 집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고1 때는 태권도를 연마했다. 형의 친구인 이준구씨한테서였다. 뒷날 미국 태권도 황제로 불리게 된 이씨는 당시 태권도 초단이었는데 조씨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 조씨는 이씨에게 발차기를 배우는 대신 복싱 기술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조씨는 체격이 큰 편이었다. 그때의 키가 지금의 키(176㎝)다. 반에서 셋째였다. 체중은 72㎏. 한국 남자 평균 체중이 42㎏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무용담을 궁금해 하자 조씨는 “나한테 맞은 친구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친구가 많은데…” 하며 웃기만 하다 거듭된 요청에 가장 힘들었다는 싸움 일화를 들려줬다.

영남고에 유도왕이 있었다. 전국대회 우승자였던 그는 80㎏이 넘는 거구였다. 양교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둘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맞붙었다. 처음엔 조씨가 계속 당했다. 상대의 유도 기술에 대여섯 차례 나뒹굴었다. 주먹을 쓸 겨를이 없었다. 구경하던 친구들이 “창조, 오늘 죽는 날이구나” 하고 웅성거렸다.

때는 8월, 여름방학 때였다. 섭씨 38℃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변수였다. 조씨가 넘어졌다가 일어나 덤비기를 계속하자 상대가 그만 지쳐버렸다. 10분쯤 지났을까, 상대가 “졌다”라고 항복을 선언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듬해엔 그해 유도 전국대회 우승자인 개성고 학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조씨의 기습적인 펀치 한 방에 상대가 기절해버린 것이다.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는 “창조 왼 주먹에 맞으면 턱이 부서진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운동선수마다 약점이 있어요. 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약점을 다 간파하고 그것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한마디로 꾀를 부린 거죠. 권투 한 친구들과도 많이 붙었는데,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권투하는 놈은 유도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 기술로 무너뜨렸지요. 실전에서 가장 덕 본 건 씨름입니다.”

실전에서 가장 덕 본 건 씨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구부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씨름은 몸 중심을 잡는 데 최고입니다. 유도는 상체를 세우지만 씨름은 구부리잖아요. 중심이 딱 잡히고 자세가 안정됩니다. 빠르게만 하면 씨름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고교 시절 대구 일대를 평정한 그는 유도 특기생으로 홍익대에 입학했다가 그가 속했던 법정학부가 폐지되자 중퇴했다. 서울역 근처 염천시장에서 외삼촌뻘 되는 친척이 국일상회라는 가게를 운영했다. 조씨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의 가게 일을 거들었다. “공부도 하면서 운동도 하고 가게 일까지 돕자니 너무 힘들었다”는 게 조씨의 회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