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소니 이후 ‘맨손싸움 1인자’ 조창조가 털어놓는 ‘주먹과 정치’ “1987년 광주유세 때 노태우 경호하다 돌맞아 죽을 뻔”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
● 대구 학원가 제패한 신화적인 학생주먹 ● 유도 잘한 전경환, 씨름선수 엄삼탁도 혼쭐 ● 시라소니 제자한테 배운 실전 격투기로 당대 주먹들 제압 ● 박치기, 무릎, 팔꿈치, 낭심차기, 눈속임…실전에선 가릴 게 없다 ● “조양은의 사보이호텔사건은 과장, 뒷날 내가 신상사 찾아가 사과” ● 10·26 직후 김종필 요청 받고 지역 조직들 연결 시도 ● 안기부 실세 엄삼탁 요청으로 대구에서 단체 결성 ● “노재우도, 김복동도, 엄삼탁도 박철언한테는 안 되더라” ● 안동교도소의 전설-한 번에 앉았다 일어서기 700회, 팔굽혀펴기 270회 ● 절친한 고교 선배 최시중 방통위원장, 높아지고 나서는 안 만나 |
2007년 11월 서울 남산의 하얏트호텔. 머리가 짧은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줄지어 늘어섰다. 곳곳에서 “형님 오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이 들렸다. 이윽고 “큰형님이 도착하셨다”는 외침과 함께 호텔 앞에 검은색 대형 세단이 도착했다. 한복을 입은 백발의 사내가 차에서 내리자 길 양옆에 도열한 청년들이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인사했다. 주먹계에서 ‘큰형님’으로 통하는 조창조씨였다. 이날 조씨의 칠순잔치에 참석한 하객은 어림잡아 2000명. 대구가 낳은 걸출한 주먹인 조창조씨는 ‘싸움의 달인’ ‘실전(實戰)의 황제’로 불린다. ‘싸움 천재’ 시라소니(이성순) 이후 맨손싸움의 1인자로 ‘맞짱’에서 져본 적이 없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칼과 조직 없이 오로지 맨손으로 최고봉에 오른 그의 이력은 주먹세계에서 이색적인 전범(典範)이다. 조씨를 인터뷰하는 데는 꽤 공을 들여야 했다. 그가 “내세울 만한 얘기가 없는 부끄러운 인생”이라며 한사코 거절했기 때문이다. 처음 제안을 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겨우 그의 이야기 보따리를 끄를 수 있었다. 백발에 안경을 낀 그는 중후한 노신사의 이미지를 풍겼다.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구였다. 가슴과 팔 근육의 단단함이 옷 밖으로 내비쳤고 배도 별로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싸움으로 단련된 탓인지 큼지막한 손등이 울퉁불퉁 거칠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가 처음이라고 했다. 1990년대 중반 안동교도소 수감 시절 모 잡지에 그를 소개하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주로 그의 주변사람들의 전언을 바탕으로 한 이 기사에는 옥중 인터뷰, 즉 기자가 그를 면회해 주고받았다는 얘기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인터뷰 사실을 부인했다. “기억에 없지만, 그 기자가 내 동생들과 함께 (나를) 면회하면서 인사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나는 인터뷰를 한 사실이 없어요. 면회 때 그런 얘기를 할 수도 없었고. 내가 했으면 했다 하지 부인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 시간 동안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몇 년 전 화제가 됐던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영화보다 그의 얘기가 더 흥미롭고 실전적이었지만. “우리는 주먹계 전시용품” 현재 한국 주먹계의 최고 원로는 신상현씨와 정종원씨다. 신씨는 1950년대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맞섰던 명동파 이화룡 계열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신상사파의 보스였다. 이정재의 직계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정씨는 지금도 주먹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적어도 족보를 존중하는 주먹들은 두 사람을 최고 어른으로 인정한다. 조씨는 주먹계의 세대교체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열었다. “신상현, 정종원 형 두 분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어른이에요. 그 밑으로 우리 또래가 있지요. 우리 밑에는 이강환 등이 있고. 내 또래 주먹으로 조일환, 최창식, 구달웅, 대전 목포내기(김기영) 등이 있습니다. 최창식은 건달생활 안 한 지 오래됐지만. 우리 또래 밑으로는 다들 모임을 만들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바로 아래 또래가 주먹계 실세입니다. 사실 우린 그림자입니다. 전시용품으로 볼 수 있죠. 동생들이 ‘형님, 와주십시오’ 하면 가서 자리를 빛내주는 정도죠. 동생들에 대한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도 없어요. 요즘 아우들 영악합니다. 형들을 상징적인 존재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야 고맙죠. 예우받는 대가로 아우들의 경조사에 참석합니다. 아우들한테는 그 자리에 어떤 형들이 왔다갔는지가 중요하고 우리는 또 그걸로 품위를 유지하는 거죠.” 하얏트호텔 칠순잔치는 그가 주먹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새삼 확인해준 사건이었다. 당시 한 주간지가 그의 고희연 행사를 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전부터 나는 주먹들 행사에서 돈을 받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몇 년 전 타워호텔에서 딸을 치울 때도 2000명이 더 몰려왔습니다. 그때 내가 다짐한 게 칠순 때는 돈을 받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지인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면서 화환과 봉투를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사실 축의금이 부담스러워 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돈 받는 접수대를 아예 폐쇄했어요. (행사) 비용은 대구의 친구들이 대줬습니다.” 대구는 조씨의 실질적 고향이자 정신적 터전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조씨는 광복 직후 8세 때 월남(越南)했다.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강원 묵호, 부산을 거쳐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외삼촌 사업이었다. 당시 그의 외삼촌은 경북 달성군에 있는 광산에서 기계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씨는 대구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월남과 전쟁통에 늦게 진학한 조씨는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세 살 많았다. 중학생 때 고등학생과 놀았다. 이명박 정부 실세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그의 대륜고 3년 선배다. 그런데 최 위원장도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학창 시절 그는 최 위원장을 형으로 부르며 가깝게 지냈다. 그의 주먹신화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가방에 권투 글러브를 넣고 다니며 방과 후 적당한 상대를 불러내 판을 벌이곤 했다. 싸움이 그렇게 좋았을까. “(웃음) 6·25 직후라 사회가 혼란하고 불안했습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권투를 워낙 좋아하긴 했어요.”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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