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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금실과 지은희 장관때문에 하마터면 "가족"개념이 사라질 뻔(고건 총리 글 중)

“거부권 행사하겠습니다” 박근혜 대표에게 전화

[중앙일보] 입력 2013.03.13 00:23 / 수정 2013.03.13 00:23

고건의 공인 50년 (21) 거부권 행사와 ‘가족’의 실종

2005년 3월 국회를 통과한 호주제 폐지 민법 개정안이 2008년 1월 시행되면서 호주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신 가족관계등록제도가 새로 만들어졌다.

 2007년 12월 13일 부산 부전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부산지법 판사들이 이 제도를 홍보하고 있다. [중앙포토]


 

거부권.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한 법안을 다시 의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권한이다. 대통령도 거부권을 쓰려면 정치권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늘 어려운 일은 연거푸 닥치는 법이다. 2004년 3월 2일 국회는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을 제한하는 사면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결정하기 1주일 전 국회에 먼저 알려 의견을 듣는 법안이다. 헌법에서 정한 3권(입법·행정·사법) 분립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무엇보다 특별사면 대상에 누구를 넣고 빼는지를 놓고 정치권에서 나눠먹기를 할 위험이 컸다.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거창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사건의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전란에 휘말려 희생 당한 다른 지역 피해자와의 형평성도 문제였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박정규 청와대 민정수석은 ‘특별사면권 제한 법안은 받아들여도 무방하지 않겠나’하는 검토 의견을 냈다. 그러나 권한대행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단을 내렸다. 2004년 3월 23일 국무회의에서 거부권 행사를 의결했다. “사면법 개정은 법리적으로 위헌 소지가 있고, 거창사건 보상 조치법은 유사 사건에 대한 파급 효과를 고려할 때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재의를 요구하겠습니다.”

그리고 박관용 국회의장에게 전화했다. “법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순 없습니다. 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다.” 박 의장의 대답은 명쾌했다. “잘 알겠습니다.”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에게도 전화했다. 지금 대통령인 박근혜 당시 대표다. 탄핵 소추 사태 후폭풍으로 최병렬 대표는 물러나고 한나라당이 천막당사에 있던 때다. “거부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 대표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국회는 권한대행이 행사한 거부권을 받아들였다.

 대신 나는 법무부에 “정부로서 사면권을 남용한다는 지적을 유념해 사법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일은 자제해야 한다. 사면권 행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사법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특별사면 심의기구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대법관 출신 등 권위 있고 독립성을 갖춘 인사들로 위원회를 꾸린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면심사위원회는 법무부 보조기관에 불과하다. 원래 구상과는 한참이나 차이가 있다. 지난 1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정치권과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별사면을 단행할 때 뒷맛이 씁쓸했던 이유다.

 어쨌든 국무총리는 시어머니 역할을 해야 한다. 건넌방에만 앉아 있지 말고 부엌에도 들러보고, 곳간도 돌아보고, 싫은 소리도 해야 한다는 거다. 그 얘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한다.

 탄핵 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2003년 10월 22일 국무회의. 호주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내용을 찬찬히 보니 이상했다.

 “호주를 중심으로 규정한 ‘가족’은 어떻게 됐죠?”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답했다. “민법상 호주 규정이 삭제되면서 가족도 자동적으로 삭제….”

 “우리 사회에서 가족·가정의 해체가 고민스러운 문제인데 정부가 민법에서 가족을 삭제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은희 여성부 장관이 의견을 말했다. “호주제 폐지에 따라 불가피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호주제는 폐지돼야 옳다. 그렇다고 가족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놓지 않은 채 민법을 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안건은 일단 보류합니다. 가족을 되살리는 방안을 마련해 다시 상정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신문에 사설이 실렸다. 총리가 호주제 폐지를 반대해서 법안을 보류시킨 것처럼 적었다. 김덕봉 총리 공보수석를 통해 정정보도를 요구했다. 반론 보도문을 실어주겠다는 답이 왔다. 반론 보도문은 내가 직접 썼다. “저는 총리로서 호주제 폐지에 찬성해 왔다. 폐지되더라도 사회 기본 단위인 가족의 개념이 민법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가족은 살리면서 호주제 폐지를 추진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두 차례 관계장관 회의를 거쳐 가족의 범위를 규정하는 민법 제779조가 만들어졌다. 실종됐던 민법상 ‘가족’의 규정을 되살렸다. 지금의 가족관계등록부·가족관계증명서는 그렇게 탄생했다.
 
정리=조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