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파구 석촌동 289-3에 세워진 사적 제101호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조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 조선인조 17년(1639년12월)에 세워졌으며 당시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盞燐?"로 삼전도비로 이름이 바뀐 것은 전두환 정권시절인 1981년. 이유는 본래의 이름이 너무 과분하다는 것...
1637년 처음, 한강의 높은 언덕(삼전도)위에 누각을 짓고 계단을 쌓은 단(檀)위에 세워졌으며

1895년 흥선대원군이 치욕스런 훙물이라 하여 강물에 쳐 넣었으나 1913년 일제치하 일본놈들이 이를 찾아 다시 세우고 1916년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하여 적극적인보호대상으로 삼았다가 다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1935년'삼전도청태종공덕비'란 명칭으로 보물제164호에 등록. 이같은 짓거리들은 우리에게는 치욕스러운 산물이었지만 왜넘의 입장에선 조선이 일찌기타국의 예속국이었다는 것을 "세뇌"시키기 위함이었으니,또한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국이었음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 하려 했음이었고 1945년 해방되자 지역주민들이 치욕스러운 비를 두고 볼 수 없다며 땅속에 파묻었으나 1963년 큰 홍수로 묻혀있던 비가 나타나자 문교부가그랬는지 당시의 대텅이 그랬는지치욕의 역사도 교훈으로 하자고 하여 다시 세우고 사적101호로 지정. 1983년 5월 도로를 넓히는 공사로 삼전도비를 세워야 하나 마나를 놓고 의견분분하다가전통이 현 위치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으로 건립하였지만 ...

앞쪽의 어린이 공원, 뒷편으로입구가 나있어 찾기가 여간 힘든게 아닌현재... 택시 기사에게 "삼전도비 갑시다" 하면 기사생활 30년 하셨다는 분도어디에 처박혔는지 헷갈려 하는 ..
 보시는 오른쪽이 삼전도비, 왼쪽의 귀부(거북이)는 설에 의하면 처음 석공들이 제작할 때 만든 것으로 내심 '적당하다'며 대충 만들었으나 청나라넘에게결재(?)받는 과정에서 크기가 작다며 더 큰 비석을 요구해 기존 것을 그대로 두고 다시 만들었을 것이다라는 추측..
비의 앞면 오른 쪽은 만주문자로 20줄, 왼쪽은 몽고문자로 20줄 뒷면은 모두 한자로 기록. 3개국의 문자로 된 유일한 비로 문자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라는 ... 비석의탁월한 예술성.....이라고 혹자는 평하지만...
비문은 백헌 이경석이, 글씨는 당시 명필가인 오준이, 두전은 여미징이 썼다고 하는데... 조선시대 글이란 선비에게는 목숨과 같은 것인데 하물며 치욕의 현장에 뉘 나서리오 인조가 당대 문장가 4인을 불러 명하니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버렸고 조희일은거칠게 글을 써 채택되지않게 작업하고 결국 인조는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 이경석은 누군가 해야할 일이란 것을 잘알고 조선의 운명인가,개인의 명예인가를 두고 갈등 끝에 자신에게 글을가르쳐 준 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배운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훗날 이 비문의 글로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 부터 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하고.. 분당에 있는 이경석의 묘앞에는 두개의 신도비가 있는데 누군가에 의해 땅속에 묻혀있는 것을 후손들이 찾아내 새로 만든 비와 함께나란히 세웠으니...
비문의 내용은 ...1637년에우리(조선)가화친을 깼기에대방(청)이 노하여 군사를 이끌고왔다 우리 임금(인조)이 위태로움에 처해 남한산성에 거하신지 50일이 되었다 청태종이 위엄과 법을 베풀도다. 황제의 공덕이 조화와 함께 흐름을 밝히니 우리 소방(조선)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뿐이로다. 처음에 미혹하여알지를 못하다가 황제의 명이 있으니 잠깨도다 이에 오직 황제의 덕에 의지하도다. 황제가 군사를 돌이켜다시금 우리에게 농사를 권하니 삼한 말년에 황제의 아름다움이로다........
한마디로 XXX같은 얘기들... 병자년에 일어난 병자국치,,,1910 경술년의 경술국치,, 지금은 비문의 글들이 다 지워졌고,,. 귀부,즉 받침돌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 졌는데비해 비는 강도가 약한 대리석... 더군다나 삼전도비에 사용된 대리석은 최약(最弱)의대리석으로 만들어져 혹자는 치욕스런 이 비가 바람과 비에 마모되어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하는...
2007.2월=========================================
 락커 테러를 감행했던 인터넷 관련 사업을 한다고 했던30대 중반의 백모씨.. 병자호란 후 370년이흘렀다는 뜻의 370...
삼전도비를 청와대로 이전할 것과 비의 내용을 한글로 옮겨 3개의 똑같은 비를
만들어 한개는 국화의사당 출입구, 또 한개는 대법원 출입구,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우고 그리하지 않을 경우 산산이 깨부수어 철거하라는 것...
백모씨는 당시 무능과 권력욕으로일관했던인조와 기득권 누리기에 급급했던그 주위 반정 세력이 중심이 된권신무리들을 14가지 항목을 들어가며 조목조목 비난, 자신이 삼전도비의 철거를 요구하는 이유는바로 그러한 역사가 후세의 의기를꺽을까 두렵기 때문이지 중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은 아니다... 삼전도에서 행해졌던 치욕적인 군신맹약의식이 너(인조)와 대신들에게는 치욕이지만 백성들에게는 노예와 죽음뿐 이었다..... ==>이 양반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계신지... 어느 역사가가 말했다지요 역사는 반복된다고... 백모씨의 주장이 작금에는더와 닿는 이유는 뭘까요
 삼전도비 앞 쪽에 위치해 있는 - 인조가 삼전도 수항단(受降檀)에서 항복하는 모습의 부조
문헌에 의하면 청 태종은 자신이 앉아있는 단에서... (청태종은 삼전도 남쪽에 황제를 우러러 보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높은 단을 설치) 1백보 앞까지 자갈을 깐 후인조로 하여금 엎드려 기어오게 한 후 단에 이르러서는"대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빌면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두드려야 하는 항복 의식... 이에 청 태종은 소리가 잘 안들린다며 ... 인조의 이마는 피로 범벅...(차마 실록에서는 빠뜨렸다고... ) 또 가식적인 절이라며 호통치는 청 태종....
이때 인조는 곤룡포도 입지도 못했으며
 신하의 의복인 남색옷을 입었다는...
 또는 청황제가 보낸 청나라 군복을 입었다는 설도 있고... 죄인이 입는 베옷을 입었다는... 의식이 끝날 때 쯤 청태종은 돼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선물이다"며 인조에게 주었고 인조는 그 옷을 입고 감사하는 뜻으로 다시 세번 절....
============================================================================ 50만명 이상의 포로와 화냥년(환향녀),호로자식이란 말이생겨났던 2대 국치 중 하나인... 병자호란의 그 아프고 치욕스런 과거의 흉물이 서울 시내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
#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1.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삼전도'라는 곳은 원래 지명(地名)으로 한강상류지역인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의 이름입니다.
17세기 당시 중국대륙에는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날로 부강해지는 후금(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고침)이 서로 중국대륙을 놓고 한창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은 후금을 적대시하여 후금으로 부터 첫번째 침략을 받게됩니다. 1627년의 이 첫번째 침략이 바로 정묘호란으로서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형제의 나라)의 약속을 하고 양국관계는 다시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조선은 겉으로는 후금과 형제지국을 지키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 명나라를 따르며 명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1632년 드디어 후금은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 전투에 쓰일 말) 3,000필과 군사 3만명 등을 요구하였습니다. 1636년 2월에는 후금의 사신 용골대·마부태 등이 조선을 찾아와 조선의 신사(臣事 : 신하의 도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계속 후금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대합니다.
1636년 12월 2일,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친히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청나라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옵니다. 청나라 군대의 침공을 까마득히 몰랐던 조선은 청나라 선봉부대가 개성을 지날때 쯤인 13일에야 겨우 알게됩니다. 인조와 신하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12월 16일부터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산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를 지탱할 수 있는 식량밖에 없는 데다가 봉림대군(인조의 둘째아들)이 피해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조선은 결국 1월 30일 항복하기로 합니다.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 항복의 의식, 당시 인조는 울면서 청 태종에게 9번 큰절을 하였다고 전해짐.)를 한 뒤 한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행한 항례를 우리들은 '삼전도의 치욕'이라고 부릅니다.
2.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맺었던 강화조약의 내용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의 세자와 둘째왕자인 봉림대군, 그리고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를 따라 청나라에 시행할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 : 공물)를 보낼 것 등.
3. 삼전도비
삼전도비는 삼전도의 지명을 딴 것으로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입니다.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큰나라 청 황제의 공과 덕을 기리는 비'인 셈입니다. 삼전도 비는 병자호란 3년 뒤인 인조 17년(1639) 12월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병자호란에서의 청 태종의 공적과 덕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전승비(戰勝碑)입니다.
이 비석은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후(1913)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원래 힘이없어 다른민족에게 지배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습니다. 그후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마자 삼전도비를 주민들은 다시 땅속에 묻어버렸는데 1963년에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자 치욕스런 역사를 되새기자며 다시 세워놓았습니다.
삼전도비는 3개국 문자가 새겨진 유일한 것으로, 전면 오른쪽에는 만주(여진) 글자로 20행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는 몽고문자 20행이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은 한문으로 새겨져 있는데 비문은 '칠분해서체'이며, 이 비의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명필인 '오준', 두전은 '여미징'이 썼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인조가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를 쓸 신하들을 뽑으면 그 자리에서 다들 사직을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이경석과 오준' 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다고 합니다.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말이 걸리기는 하지만 역설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먼저, 삼전도에 관련한 내용을 살펴야 하겠지요.
삼전도 [三田渡]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
1439년(세종 21)에 신설된 나루로, 도성(都城)의 중심지로부터 30리 지점, 상류의 광나루[廣津]와 하류의 중랑포(中浪浦) 사이에 있었다. 당시 서울과 광주의 남한산성을 이어주는 나루로서, 종9품의 도승(渡丞)을 두어 이를 관리하였다.
서울에서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와 뚝섬 사이 살곶이다리[箭串橋]를 지나, 신천동(新川洞)과 잠실동이 있는 하중도(河中島)를 건너 송파에 이르도록 뱃길이 마련되었다. 병자호란 때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곳이며,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이기도 한 삼전도비(三田渡碑)로 더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하중도의 송파 쪽으로 흐르는 강수(江水)가 많아서, 1950년대 말까지 나룻배가 다녔다. 지금은 잠실대교가 놓이고 한강변이 개발되어, 옛날과 같은 나룻배와 나루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
요약 |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이 조선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지은 전승비(戰勝碑). | | 지정번호 | | 사적 제101호 | 지정연도 | | 1963년 1월 21일 | 소재지 | | 서울 송파구 석촌동 | 시대 | | 1639년 | 크기 | |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 종류 | | 전승비 |
|
|
|
본문 |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95m. 너비 1.4m. 무게 32t. 재료는 대리석이다.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1639년(인조 17)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吳竣), 전(篆)은 오이징(吳爾徵)이 썼다.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한 사실이다.
비의 앞면에는 한문, 뒷면에는 만주문(滿洲文)·몽골문으로 번역되어, 한 비 안에 3개국 문자가 들어 있는 특이한 비석이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가장 우수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원래 석촌호(石村湖) 주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치욕적인 의미 때문에 청일전쟁 때 매몰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다시 세워지고, 1956년 문교부(지금의 교육부)가 국치의 기록이라 해서 다시 땅 속에 묻었다가, 다시 지금의 위치에 세우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서울시는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사실(史實)을 그대로 보여 교훈이 되도록 비 일대에 500평 규모의 소공원을 조성, 여기에 당시의 모습을 그린 부조비(浮彫碑)를 세워 1983년 5월 문을 열었다. |
=================================================================== 삼전도의 치욕의 진실-인조는 땅바닥에 머리를 찧었는가? 우리 역사에서 나라가 망하지는 않으면서 임금이 외국의 임금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 적이 두차례있다. 한차례는 고려때 원나라에게, 두번째는 조선때 청나라에게다.
둘중에서도 두번째 것은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전개가워낙에 드라마틱(?)하여 더욱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병자호란으로 명명된 그 사건의 전말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것이 있다.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한 인조(仁祖)가 머리를 땅바닥에 쿵쿵찧어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는 주장이다. 요즘엔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것이 과연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그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 "용골대(청의 장수)가 말하기를 ‘ 황제가 심양(瀋陽)에 있다면 (항복)문서만 보내도 되겠지만 지금은 이미 (황제가 삼전도에)나왔으니 국왕이 성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15년 1월 21일 용골대가 말하기를 "항복에는 예부터 규정과 제도가 있소. 으뜸절목(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참담하니 둘째절목으로 하겠소. 그것은 오백명의 하인을 거느리되 위엄있는 차림(용포)는 없애고 군사의 호위도 없애는 것이오. 또한 죄가있는 자는 정문으로 나올수 없으니 서문으로 나옴이 옳소"라 하였다. -비어고, 인조 15년 1월 28일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한(황제)의 말을 전하기를,“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상이 대답하기를,“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T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 -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시자,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셔서 서향하여 한의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였다.한이 남향(임금은 남향하여 앉는다)하여 앉아서 술과 안주를 베풀어 놓고 임금께 돈피(모피) 두벌을 주니 임금께서 그중 한벌을 입으셨다.- 산성일기 15년 1월 30일 이처럼 실록을 비롯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어느 문헌에도 인조가 쾅쾅 머리를 찧었다는(그것도 소리가 안난다 하여 수십번씩) 기록은 없다. 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또는 삼배구고두)라는 만주풍습은 세번 무릎꿇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닿을 정도로) 조아린다는 뜻으로신하가 황제를 알현할 때 행하는 의식이다. 하지만 머리를 실제로 땅에 대는것은 절대 아니다(청조를 다룬 중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어느 정도로 조아리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청은 인조에게 이 당연한 의식을 요구한 것이다. 황제가 오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조선에 직접 왔는데 인조는 당연히 황제를 알현하여 그에 맞는 예(삼배구고두)를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인조는 패전국의 임금이었다. 봉건시대에 패전국의 임금은 심한경우 평민으로 강등되거나 유배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인조의 경우는 많이 봐준 것이었다. 비록 용포는 입지 못하지만 시종을 거느리고 백마를 타고 삼전도까지 갔으며 항복의식을 마친후에는 황제의 오른쪽에 앉게 되지 않았는가? 물론 우리의 임금이 적국의 임금에게, 그것도 오랑캐에게 무려 아홉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려가며 항복했다는 사실은 조선에게있어 엄청난 충격이자 치욕이었다. 또한 원나라에 항복한 뒤 거의 복속되어 버렸던 고려와는 달리 사실상 청나라로부터 자유로웠던 조선은호란 이후에도 청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더 키워왔다.그런 증오심과 치욕감이 조선민중들 사이에서 "우리 임금님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실때 머리를 땅에 찧으시고 피를 흘리셨다"라는 소문을 만든것일까? 사실 그러한 소문이 조선시대에 광범위하게 돌았는지 조차 확실치 않다. 추측컨데일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것이 오늘날에는 거의 사실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병자호란과삼전도의 굴욕은 인조와 서인정권이 자초한 일이니 그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지만 적어도 그런 근거없는 낭설은 인조를 두번죽이는 일이라 생각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