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수원화성 팔달문. (사진제공: 문화재청) |
사도세자 묘소 이전… 이면엔 수도 옮겨 기득권층 정리 韓 건축디자인史 ‘돌연변이’… 정약용 등용 과학적 설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 사이에는 길이 5.4km 성곽이 걸쳐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수원화성’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를 빼놓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의욕과 당쟁, 가족사가 얽힌 곳이다.
◆정조, 수원화성 건립을 도모하다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을 두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불행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에 신도시를 건설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수원화성의 규모나 건축 디자인으로 보아 단순히 사도세자만을 위한 계획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아버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 했던 당시 기득권층 노론세력을 정리하고 새롭게 부강한 나라를 세울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 묘소 이전을 핑계 삼아 수원을 신도시로 만들고 수도를 옮기려 한 것이다.
옛말에 ‘나무는 그 가지를 보면 안다’고 했다. 수원화성 축성 작업이 시작되자 백성들이 자원해서 성곽 작업에 참여했다는 <화성성역의궤> 기록을 통해 정조가 어진 성품으로 옳은 정치를 펼치고, 백성을 살폈던 왕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  | | ▲ 수원화성 화서문. (사진제공: 문화재청) |
◆사례 없는 독창적인 디자인
사실 수원화성은 일제 식민지시대를 전후해 심각하게 훼손됐다. 한국 전쟁 때는 시가전으로 타격받아 장안문 문루(위에 덧 올린 다락집)의 반 이상이 날아갔으며, 포루ㆍ공심돈 등 성벽 위의 건축물도 대부분 파괴됐다. 현재의 화성 모습은 1975년 이후 한국 전쟁 때 파손된 부분을 복원한 형태다.
한국 건축계 대가로 불리는 김봉렬 교수에 따르면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사상 디자인으로 보아 돌연변이로 불릴 만큼 독창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화성은 당시 성곽 건축물로는 독창적인 디자인을 지녔다. 성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치성’ 위에는 전투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공심돈, 다양한 루(다락)와 대(물건 얹는 곳) 등 여러 가지 특수시설이 설치됐다.
정조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인 실학 정신을 중요시 여겼다. 그는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대거 등용하고 수원화성 축성에 참여시켜 치밀하고 과학적인 건축 계획을 세우게 했다. 그 결과 녹로와 거중기, 유형거와 같은 과학 기구가 개발돼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줄이고 건축 기간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수원화성은 둘레 5.4km 40여 개의 건물들이 모인 대형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한 계획 덕에 공사 시간은 약 2년 반 만에 완공했다. 당시 건설 감독은 채제공이 맡았다.
정조는 체계적인 방어시설도 구축한데 이어 아름다운 미관을 자랑하는 건축물도 세웠다. 방화수류정, 화홍문, 서장대 등 군사시설용 성곽이라고 하기에는 아기자기한 건축물들이 다양한 멋을 뽐낸다.
당시 채제공은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을 ‘방화수류정에 올라(登訪花隨柳亭)’라는 시로 지어 표현했다.
|  | | ▲ 수원화성 화홍문. (사진제공: 문화재청) |
◆화성행궁 짓고 ‘효’ 다해
행궁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 머무는 곳으로, 수원화성의 화성행궁은 한국에 있는 행궁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정조는 재위 13년 10월에 이뤄진 현륭원 천봉부터 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친 원행(園行)을 정기적으로 행했다.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성행궁은 화성 축조가 완공되는 것과 때를 같이하면서 576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이 됐다. 즉 정조 13년 9월에 행궁을 비롯해 화성 내의 부속건물을 신축한 이래 정조 14년 5월 정당(正堂)ㆍ내아ㆍ득중정ㆍ진남루 등이 증축되고, 정조 18년 성역이 시작돼 정조 20년에 완공되기까지 계속 진행되면서 행궁과 부속관아를 대폭 증축 또는 신축해 총 576칸의 규모를 갖추게 됐다.
또한 정조가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위민과 개혁을 실천하고자 했던 역사적 공간이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진찬연’ 등을 베풀었던 ‘효’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화성행궁은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 보존ㆍ관리되고 있다.
이러한 정조의 포부가 그대로 담긴 수원화성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개혁 정치를 다 펼치지 못한 그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