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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위당 정인보 "자모사"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i/si-jo-hyeon-dae/ja-mo-sa.htm

 

자모사(慈母思)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1

 

가을은 그 가을이 바람불고 잎 드는데

 

가신 님 어이하여 돌오실 줄 모르는가

 

살뜰히 기르신 아이 옷 품 준 줄 아소서

 

   2

 

부른 배 골리보고 나은 얼굴 병만 여겨

 

하루도 열두 시로 곧 어떨까 하시더니

 

밤송인 쭉으렁*인 채 그지 달려 삽내다

 

   3

 

동창에 해는 뜨나 님 계실 때 아니로다

 

이 설움 오늘날을 알았드면 저즘미리

 

먹은 맘 다 된다기로 앞 떠날 줄 있으리

 

   4

 

차마 님의 낯을 흙으로 가리단 말

 

우굿이 어겼으니 무정할 손 추초(秋草)로다

 

밤 이여 꿈에 뵈오니 편안이나 하신가

 

   5

 

반갑던 님의 글월 설움될 줄 알았으리

 

줄줄이 흐르는 정 상기 아니 말랐도다

 

받들어 낯에 대이니 배이는* 듯하여라

 

   6

 

므가나 나를 고히 보심 생각하면 되 서워라

 

내 양자(樣子) 그대로를 님이 아니 못보심가

 

내 없어 네 미워진 줄 어이 네가 알것가

 

   7

 

눈 한번 감으시니 내 일생이 다 덮여라

 

질 보아 가련하니 님의 속이 어떠시리

 

자던 닭 나래쳐 울면 이때리니 하여라

 

   8

 

체수는 적으셔도 목소리는 크시더니

 

이 없어 옴으신 입 주름마다 귀엽더니

 

굽으신 마른 허리에 부지런히 뵈더니

 

   9

 

생각도 어지럴사 뒤먼저도 바없고야

 

쓰다간 눈물이요 쓰고 나니 한숨이라

 

행여나 님 들으실까 나가 외워 봅니다

 

   10

 

미닫이 닫히었나 열고 내다보시는가

 

중문 턱 바삐 넘어 앞 안 보고 걸었더니

 

다친 팔 도진다마는 님은 어대 가신고

 

   11

 

젖 잃은 어린 손녀 손에 끼고 등에 길러

 

색시꼴 백여가니 눈에 오즉 밟히실가

 

봉사도 님 따라간지 아니 든다 웁내다

 

   12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되고 말어라

 

   13

 

썩이신 님의 속을 깊이 알 이 뉘 있스리

 

다만지 하루라도 웃음 한번 도읍과저

 

이저리 쓰옵던 애가 한 꿈되고 말아라

 

   14

 

그리워 하 그리워 님의 신색 하 그리워

 

닮을 이 뉘 없으니 어딜 향해 찾으오리

 

남으니 두어 줄 눈물 어려 캄캄하고녀

 

   15

 

불현듯 나는 생각 내가 어이 이러한고

 

말 갈 데 소 갈 데로 잊은 듯이 열흘 달포

 

설움도 팔자 없으니 더욱 느껴 합내다

 

   16

 

안방에 불 비치면 하마 님이 계시온 듯

 

닫힌 창 바삐 열고 몇 번이나 울었던고

 

산 속에 추위 이르니 님을 어이 하올고

 

   17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게서 자라날 제 어인 줄을 몰랐고여

 

님의 공 깨닫고 보니 님은 벌써 머셔라

 

   18

 

태양이 더웁다 해도 님께 대면 미지근타

 

구십춘광(九十春光)이 한 웃음에 퍼지서라

 

멀찌기 아득케나마 바랄 날이 언제뇨

 

   19

 

어머니 부르올 제 일만 있어 부르리까

 

젖먹이 우리 애기 왜 또 찾나 하시더니

 

황천(黃泉)이 아득하건만 혼자 불러 봅내다

 

   20

 

연긴가 구름인가 옛일 벌써 희미(熹微)해라

 

눈감아 뵈오려니 떠오느니 딴 낯이라

 

남없는 거룩한 복이 언제런지 몰라라

 

   21

 

등불은 어이 밝아 바람조차 부는고야

 

옷자락 날개 삼아 훨훨 중천 나르과저

 

이윽고 비소리나니 잠 못 이뤄 하노라

 

   22

 

풍상(風霜)도 나름이라 설움이면 다 설움가

 

오십년 님의 살림 눈물인들 남을 것가

 

이저다* 꿈이라시고 내 키만을 보서라

 

   23

 

북단재 뾰죽집이 전에 우리 외가(外家)라고

 

자라신 경눗골에 밤동산은 어디런가

 

님 눈에 비취던 무산 그저 열둘이려니

 

   24

 

목천(木川)집 안방인데 누우신 양 병중이라

 

손으로 머리 짚자 님을 따라 서울길로

 

나다려 말씀하실 젠 진천인 듯하여라

 

   25

 

뵈온 배 꿈이온가 꿈이 아니 생시런가

 

이 날이 한 꿈되어 소스라쳐 깨우과저

 

긴 세월 가진 설움 맘껏 하소 하리라

 

   26

 

시식(時食)도 좋건마는 님께 드려 보올 것가

 

악마듸 풋저림을 이 없을 때 잡숫더니

 

가지록 뼈아풉내다 한(恨)이라만 하리까

 

   27

 

가까이 곁에 가면 말로 못할 무슨 냄새

 

마시어 배부른 듯 몸에 품겨 봄이온 듯

 

코끝에 하마 남은가 때때 맡아 봅내다

 

   28

 

님 분명 계실 것이 여기 내가 있도소니

 

내 분명 같을 것이 님 가신지 네 해로다

 

두 분명 다 허사외라 뵈와 분명하온가

 

   29

 

친구들 나를 일러 집안 일에 범연타고

 

아내는 서워라고 어린아이 맛없다고

 

여린 맘 설움에 찢겨 어대 간지 몰라라

 

   30

 

집터야 물을 것가 어느 무엇 꿈아니리

 

한 깊은 저 남산이 님 보시던 옛 낯이라

 

게섰자 눈물이리만 외오 보니 설워라

 

   31

 

비 잠깐 산 씻더니 서릿김에 내 맑아라

 

열구름 뜨자마자 그조차도 불어 없다

 

맘 선뜻 반가워지니 님 뵈온 듯하여라

 

   32

 

마흔의 외둥이를 응아하자 맏동서께

 

남없는 자애렸만 정 갈릴가 참으셨네

 

이 어찌 범절만이료 지덕(至德)인 줄 압내다

 

   33

 

찬 서리 어린 칼을 의로 죽자 내 잡으면

 

분명코 우리 님이 나를 아니 붙드시리

 

가서도 계신 듯하니 한 걸음을 긔리까*

 

   34

 

어느 해 헛소문에 놀라시고 급한 편지

 

네 걸음 헛디디면 모자 다시 안 본다고

 

지질한 그날 그날을 뜻 받았다 하리오

 

   35

 

백봉황(白鳳凰) 깃을 부쳐 도솔천궁(兜率天宮) 향하실 제

 

아득한 구름 한점 옛 강산이 저기로다

 

빗방울 오동에 드니 눈물 아니 지신가

 

   36

 

엽둔재 높은 고개 눈바람도 경이랏다

 

가마 뒤 잦은 걸음 얘기 어이 그쳤으리

 

주막집 어둔 등잔이 맛본상을 비춰라

 

   37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鴨綠)이라 엿자오니

 

고국산천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38

 

개울가 버들개지 바람 따라 휘날린다

 

행여나 저러할라 돌이고도 굴지 마라

 

이 말씀 지켰다한들 누를 향해 사뢸고

 

   39

 

이만 사실 님을 뜻조차도 못받든가

 

한번 상해드려 못내 산 채 억만년을

 

이제와 뉘우치란들 님이 다시 오시랴

 

   40

 

설워라 설워라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풀 욱은 오늘 이 살붙어 있단 말가

 

빈 말로 설운 양함을 뉘나 믿지 마옵소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희망의 문학 지은이 : 정인보(鄭寅普, 1893-?)

 

희망의 문학 갈래 : 평시조. 연시조(중에 한 수). 현대시조. 정형시

 

희망의 문학 형태 : 구별 배행(句別 排行)

 

희망의 문학 율격 : 3(4).4조. 4음보. 3장 6구의 외형률

 

희망의 문학 성격 : 의고적(擬古的). 회고적

 

희망의 문학 어조 : 후회와 그리움

 

희망의 문학 심상 : 비유적 심상

 

희망의 문학 구성 : (내용 연구에 실린 작품)

 

   (12) 어머니의 희생과 죽음

 

   (17) 어머니의 은혜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

 

   (37) 유랑길에서의 어머니

 

   (40) 불효에 대한 자탄

 

희망의 문학 제재 : 어머니의 자애와 희생. 아들로서의 불효

 

희망의 문학 주제 : 어머니의 자애와 희생에 대한 회고와 그리움

 

희망의 문학 출전 : <신생(新生)>(1925). <담원 시조집>(1947)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12)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나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補空)되고 말아라.

 

 

(17)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게서 자라날 제 어인 줄을 몰랏고여

 

님의 공 깨닷고 보니 님은 발서 머서라.

 

(37)

 

이 강이 어느 강가, 압록(鴨綠)이라 여짜오니

 

고국 산천(故國山川)이 새로이 설워라고

 

치마끈 드시려 하자 눈물 벌써 굴러라.

 

(40)

 

설워라 설워라 해도 아들도 딴 몸이라.

 

무덤 풀 우군 오늘 이  살 부터 있단 말가.

 

빈말로 설은 양함을 뉘나 밋지 마옵소.

 

 

희망의 문학 밤송인 쭉으렁 : 우리 속담에 쭉으렁 밤송이 삼년 달린다는 말이 있다. 다병

 

(多病)한 사람이 그대로 부지하는 것을 이에 견주어 말하며 못 생기고 오래 사

 

는 것을 이에 견주어 말한다.

 

희망의 문학 우긋이: 茂盛한 모양

 

희망의 문학 배이는 : 점읍

 

희망의 문학 므가나 : 미운

 

희망의 문학 양자(樣子) : 모양

 

희망의 문학 질 : 저를

 

희망의 문학 봉사 : 봉선화의 와(訛), 소녀들이 봉선화를 짓찧어서 손톱에 홍색을 들이니

 

이를 봉사들인다고 한다

 

희망의 문학 이저다 : 이것 저것 모두

 

희망의 문학 뾰죽집 : 천주교당(天主敎堂)의 속어

 

희망의 문학 경눗골 : 정릉동(貞陵洞)

 

희망의 문학 무산 : 무산(巫山) 십이봉(十二峰)

 

희망의 문학 악마듸 : 억세인 것

 

희망의 문학 긔리까 : 만과(瞞過), 속여 넘김

 

희망의 문학 맛본상 : 겸상으로 보아 놓은 밥상

 

희망의 문학 바릿밥 : 놋쇠로 만든 여자의 밥그릇에 담긴 밥. 여기서는 어머니의 몫으로 담아 놓은 더운 밥을 의미한다.

희망의 문학 보공(補空) : 관 속에 시신을 눕히고 빈 부분을 채움. 또는 그 부분을 채우는 물건

희망의 문학 밤중만 : 밤이면

 

희망의 문학 어매 :  어머니 의 사투리

 

희망의 문학 어인 줄을 :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희망의 문학 몰랏고여 : 몰랐구나

 

희망의 문학 발서 :  벌써 의 사투리

 

희망의 문학 머서라 : 멀리 계신는구나

 

희망의 문학 설워라고 : 섧다 하고

 

희망의 문학 우군 : 우거진

 

희망의 문학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나니 찬 것이며, : 놋그릇에 담은 따뜻한 밥은 남에게 주시고 어머니는 늘 찬밥을 잡수셨다는 뜻으로,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희생적인 모성애를 표현하고 있다.

희망의 문학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補空)되고 말아라. : 겨울에는 솜치마 좋다고 하시면서도 그것을 아끼시느라 입지 않으시더니, 끝내 그 솜치마는 돌아가신 뒤에 관의 빈 곳을 채우는 옷이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근검한 생활 태도와 그에 대한 시적 자아의 안타까움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희망의 문학 밤중만 어매 그늘 세 번이나 나린다네 :  아이가 잘 때에도 어미의 이슬이 세 번 내린다 라는 속신(俗信)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어머니의 끊임 없는 정성을 인유적(引誘的)으로 서술하고 있다.

희망의 문학 고국 산천(故國山川)이 새로이 설워라고 :  새삼 고국 생각이 나서 서럽다고

 

하시고 의 뜻으로 고국을 떠나 유랑민이 된 설움이 새삼 복받치고 있음을 표

 

현하고 있다.

 

희망의 문학 무덤 풀 우군 오늘 이 살 부터 있단 말가. : 어머님 묻히신 곳에 풀이 우거진

 

오늘날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바쁜 일상 생활에 찌들려 어머님

 

생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돌아가신 후에야 뼈저리게 뉘우침을

 

표현한 것이다.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작품에 보이는 어머니는 한국의 정통적인 어머니 상(像)이다. 지은이는 그 어머니를 회상하며 자신의 보잘것없는 정성을 자책하고 있다.

 

제12수 : 어머니는 자식과 가족들을 위하여 언제나 자신의 안락함을 희생하시었다. 바리에 담긴 따뜻한 밥은 다른 식구들 특히 자식들에게 먹이시고, 당신께서는 늘 찬밥을 잡수셨다.

 

겨울이면 자식들에게 따뜻하게 입히시면서도 어머님 자신은 늘 엷은 옷으로 지냈다.

한 벌 가지고 계셨던 솜치마를 좋다고 하시면서 아끼느라 못 입으시더니 마침내 돌아가신 뒤 관 속에 채워 넣는 옷이 되고 말았구나.

 

제37수 : 여성으로서도 나라를 잃은 슬픔을 깊이 느끼시었던 어머니의 모습이다.

고국의 땅을 떠나는 길에 이 강이 어느 강이냐고 물으시기에 압록강이라 말씀드리니 고국 산천을 잊지 못하여 서러워하신다.

 

그 슬픔의 눈물은 마치 닦을 겨를도 없이 흘러 내렸다.

 

제40수 : 지극한 사랑과 덕을 지니셨던 어머니를 회상하며 자식으로서의 부족한 정성을 자책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아무리 서럽다고 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님의 크나큰 사랑에 비하면 아들조차도 그에 못 미치는 딴 몸인 것 같다.

 

어머님 무덤에 풀이 우거진 오늘, 자식인 나는 내 자신의 삶에 바빠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구나. 때때로 슬퍼하는 체하여도 그것은 어머님의 깊은 사랑에 비하여 마치 빈말이나 다름 없는 것이니 누구라 한들 믿지 마십시오.

 

어머님을 생각하는 간절한 그리움과 정성이 구절마다 서리어 있는 작품이다. 시조 형식의 간결함과 안정감이 여기에 더 깊은 맛을 더해 주고 있다. [해설: 김흥규]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1

 

 이 작품들은 전체가 40수로 이루어진 연시조의 일부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이 전아한 언어 속에 잘 융합되어 있다.

특히, 시조의 형식과 자수율을 맞추기 위해 옛말이나 옛글에서 시어를 선택하여 현대어로 풀어 쓴 기교가 돋보인다.

 

 (12)는 자식들을 위하여 찬 음식과 엷은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통하여 어머니의 희생을 표현하고 있다.  

보공 이 된 솜치마는 이러한 어머니의 희생과 죽음뿐만 아니라 시적 자아의 안타까움을 절절히 나타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가슴 저린 감동을 느끼게 한다.

 

(17)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다. 예로부터 속신(俗信)에  아이가 잘 때 어미의 이슬이 세 번 내린다. 는 말이 전해 온다. 이 말은 자는 아이에게도 어머니의 정성은 끊임없이 쏟아 부어진다는 뜻이다.

 

 (37)은 고국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게 되는 데서 느끼는 어머니의 아픔이  치마끈 과  눈물 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에 해당하는 (40)은 헌신적인 사랑으로 가득했던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과 자식으로서의 정성이 부족함을 자책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종장에서의  빈말로 설은 양 은 자신의 정성이 부족함을 반어적으로 부각시켜 표현하고 있다.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고마움과 느꺼움을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째 수는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를,

둘째 수는 어머니의 사랑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의 불민함을 노래하였고,

셋째 수는 그런 자신의 심경을 어머니 부르며 달려가는 어린이를 바라보며 거기에 투사하고 있다.

자신이 그럴 수 없음에 비기면서, 또 그렇게 사랑을 지닌 태도를 칭송함으로써 어머니 그리는 마음을 더욱 절실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조가 그러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적인 말은 종장의 마지막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라게만 하소서 와  나 같은 이 있으리 가 그러하며,  발 못 돌려 하노라 에서는 간절함과 애틋함이 심화되면서 종결된다.

 

  여기에서는 작품 속에 담긴 모정(母情)에의 그리움이 시대를 초월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라는 점을 간파하는 데 중점이 있다.

또한, 시조의 전통이 오늘날에 이어지고 있음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 문학의 특질을 확인할 수 있다.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희망의 문학 자모사 의 배경

 

 작자에게는 생모(生母-대구 서씨)와 양모(養母-양자로 간 집, 월성 이씨) 두 어머니가 계셨는데 두 어머니가 다 숙덕(淑德)이 장하고 자애(慈愛)가 깊었다고 한다.

 

이 시조는 두 분이 다 돌아가신 후에 쓴 작품이며, 이 시조에서 읊어지는 어머니는 그 중 어느 한 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어느 분이나 생각나는 대로 한 수씩 지어 나간 것이다.

 

자모사에 붙인 그의 해제에서  생어머니는 높고 양어머니는 크다.  어머니 한 분을 먼저 여읜 뒤는, 한 분머저 여의면 나는 부지하지 못할 줄로 알았다.

 

그러다가 목천서 어머니 상사(喪事)를 당했다.     

 

그 가을에 서울로 이사하여 오니 갈수록 서러워 길 가다가도 가끔 혼자 울었다.

 

이 시조는 병인년 가을에 지었다. 라고 자모사의 창작 배경을 밝히고 있다.

 

희망의 문학 정인보(鄭寅普)   

 

 1892(고종 29)∼? 한학자·교육자.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경시(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饋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유길(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원용(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호조참판을 역임한 은조(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그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 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 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그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 饋園時調集≫·≪담원문록 饋園文錄≫·≪담원국학산고 饋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饋園鄭寅普全集.(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