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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지도력-고건 전 총리의 회고담에서(중앙일보)

“김 장관, 농림부는 버거워요” 박 대통령이 다독였다

[중앙일보] 입력 2013.04.05 00:09 / 수정 2013.04.05 00:20

[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38> 치산녹화 ③

1973년 3월 내무부는 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해 7월 도청 단위로 열린 10개년 계획 교육 설명회 현장. [중앙포토]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하는 일은 결국 내 몫이 됐다. 차트사가 밤을 새웠지만 시간이 모자랐다. 보고 시간인 오전 10시에 임박해 차트를 완성했다.

 청와대 회의실 앞에 도착하니 예정 시간보다 10분이 더 지났다. 계장과 함께 갔지만 경호원 제지 때문에 혼자 차트를 둘러메고 보고 장소에 들어갔다. ‘감히 대통령 보고회에 10분이나 늦다니.’ 덜덜 떨며 회의장에 들어섰다. 박 대통령과 국무총리, 관계부처 장관 모두가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정신에 차트를 걸고 했는지 모르겠다. 심호흡을 하고 인사를 했다.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기본 방향을 국민조림, 속성조림, 경제조림 세 가지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첫째, 모든 국민이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참여하는 국민조림을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지금 홍수와 산사태가 반복되고 있으니 우선 속성녹화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셋째, 장기적으로 경제조림을 추진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 쪽을 훔쳐보니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휴….’ 안심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제야 준비한 대로 찬찬히 브리핑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고 중간중간 대통령은 여러 번 질문을 하고 많은 얘기를 했다. 산림 녹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집념이 느껴졌다.

 국토조림녹화 1차 10개년 계획은 속성조림에 중점을 뒀다. 이에 맞는 10대 수종을 정했다. 이탈리아포플러, 은수원사시나무, 리기테다소나무, 그리고 연료림 수종인 아까시나무가 10대 수종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10대 수종에 대한 설명을 끝마치자마자 박 대통령이 사단장 시절 얘기를 꺼냈다. 부대 순시 길에 플라타너스 가지를 지팡이 삼아 꺾고 짚고 다니다가 무심코 거꾸로 꽂아놓고 귀대했는데 나중에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다 보니 거꾸로 꽂힌 지팡이에서 싹이 돋았다고 했다.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했다고 말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졌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왜 속성수종에 안 들어있지?”

 대통령 말씀이라고 ‘네, 추가하겠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각하, 플라타너스는 평지 가로수용으로는 적합한데 산지조림 수종으로는 아직 검증이 안 됐습니다.”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은 이 자리에서 국가정책으로 결정됐다. 농림부 소속의 산림청을 새마을 주무부인 내무부로 이관하는 방침도 이 자리에서 정해졌다. 조림녹화사업을 새마을운동에 의한 국민조림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산림청을 내무부에 빼앗기게 되자 김보현 농림부 장관은 얼굴이 벌개지며 준비해온 반대 논거 자료를 펴들려고 했다. 김 장관은 내무부 초임 사무관 때 보고 배웠던 나의 멘토이기도 했다.

 자료를 뒤지고 있는 김 장관에게 박 대통령이 말을 건넸다.

 “김 장관, 지금 농림부는 국가적으로 제일 중요한 식량 자급에 매진해야 하는데 산림녹화까지 하기엔 힘이 버거워요. 1차 계획기간만 산림청을 내무부에 빌려줬다가 1차 계획이 끝나면 돌려받도록 하시죠.”

 그가 쓴 ‘버거워요’란 표현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목소리도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었다. 김 장관의 위신도 세워주면서 설득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군 출신 대통령의 일방적 명령이 아닌 사범학교 교사 출신다운 설득의 리더십이었다.

 며칠 후 국토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의 명칭은 박 대통령에 의해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림청 역시 내무부 소관으로 넘어왔다. 치산녹화 계획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좋은 편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시·도지사, 시장, 군수, 산림관계관 회의를 열어 계획을 시달하는 업무는 내가 직접 맡았다.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은 그렇게 출발했다.
 
정리=조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