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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의거 전후의 우리나라 상황(동아일보 기사 발췌)

그러나,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1961년 12월 가난한 거지들의 삶을 조명한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사진. 아기를 업고 구걸하는 엄마 거지와 그 옆을 지나는 거적때기 거지의 모습에서 비참한 생활상이 느껴진다. 당시는 도심 길거리에 이런 모습이 흔했다. 동아일보DB

4·19 직후인 1960년 12월 동아일보는 ‘세모비정(歲暮非情)’이란 제목의 12회에 걸친 시리즈물에서 1년 중 가장 살기 힘든 겨울을 힘겹게 이어가는 서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다. ‘염소장수’ ‘품팔이군’ ‘군밤장수’ ‘빈민굴’ ‘바가지장수’ ‘구두닦이’ ‘노점음식점’ ‘생선장수’ ‘고아’ ‘양로원’ ‘모자원’ ‘지지미 장수’라는 제목의 각각의 글을 읽다보면 ‘못살아도 이렇게 못살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품팔이군’의 삶은 이렇다.

‘오직 나무로 깎아 엮은 지게와 좀 낫다면 ‘구루마’가 그들에겐 생명선이다. 생활근거지는 주로 시장주변. …시커멓게 때가 오른 두툼한 방한모. 농사에 지친 나머지 서울 가면 주먹만 갖고도 끼니는 때울 수 있다는 바람에 뛰어올라 왔으나 역시 서울도 바람은 모질다.…허리가 부러지도록 짐을 지고 십리 길을 가도 잘해야 단돈 사, 오백환…공(허탕)치고 빈 손을 힘없이 걸머쥔 채 허기진 배를 안고 처자식들이 쓰러져 있는 다리 밑 거적대기집으로 돌아갈 때는 산다는 그 자체에 몸서리가 치고 무서워만 진다.’

그때 우리는 너무 헐벗고 굶주려 지금 기준으로 가늠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정도다. 식민통치에 이은 미 군정, 여기에 3년이나 혹독한 전쟁을 치렀으니 다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오죽했으면 겨우내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매년 음력 4월을 ‘보릿고개’라고 했을까. 마치 큰 고개를 넘는 것처럼 힘들어 농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서민들은 굶어죽는데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3·15부정선거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갈아엎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분노가 극에 달하자 시민들까지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4·19는 미완의 혁명이었다.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는 했지만 준비된 민주정부 플랜도 없었고 비전은 전무했다. 그 결과, 오히려 대통령의 하야는 민주국가의 건설이 아닌 한층 복잡한 혼란을 불러왔다.

승리의 영광은 기존 정치권으로 고스란히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외무부 장관이었던 허정이 정권을 이어받았다. 허정 과도내각은 7월 29일 총선을 통해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8월 12일 대통령에 윤보선(1897∼1990), 19일 초대 국무총리에 장면이 당선됐다. 의원내각제이다 보니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명목상 대통령이었다. 진정한 정치권력은 장면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쥐었다. 이들은 기존 부패 정치인들에게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입장이 아닌 자신들만의 권력과 사리사욕을 위해 일하면서 파벌 싸움에만 몰두했다.

기자는 당시 한국 상황을 생각하며 지난해 5월 취재차 방문했던 ‘혁명 후 이집트’가 떠올랐다. 무바라크 독재시대가 끝난 이집트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실제 현장에 가보니 혼란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규칙과 질서는 무너져 있었고 경제는 악화됐으며 시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있었다. 국가재정은 바닥나고 관광객의 발길도 끊긴 지 오래였다. 시민들 중에는 “무바라크 시절이 더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집트의 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이집트를 보며 파괴보다 건설이 더 힘들다는 것, 준비 없는 혁명은 혼돈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끝 모를 혼란과 무질서의 소용돌이… 4·19 직후 대한민국이 바로 그랬다.

학생과 시민들은 승리감에 도취됐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민중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날이면 날마다 시위를 벌였다. 오죽했으면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책 ‘제2공화국과 장면’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나와 있다.

‘남자나 여자, 노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들 나서 목청을 높였다.…초등학생들이 ‘교사전근반대’ ‘어른들은 이제 데모를 그만하라’고 요구하며 데모를 했는가 하면 경찰관들은 ‘국회의원이 경찰관 따귀를 때렸다’고 시위를 했다. 군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논산훈련소에서는 정훈부 사병들이 ‘송모 중령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려먹는다’고 항의데모를 벌이려고 해 장교들이 가까스로 저지한 일도 있었다.’

책에 따르면 실제로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10개월 동안 일어난 가두데모 건수는 총 2000건이었으며 데모에 참가한 연인원만 100만 명이었다. 서울에서는 하루평균 7.3건, 3867명이 거리로 나왔다. 노조 활동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4·19 직전만 해도 전국에 621곳이던 노동조합은 4·19 직후인 60년 9월 1일 현재 821곳으로 급증했다. 노동쟁의도 58년에 50건, 59년 109건에서 60년 218건으로 급증했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4·19 이듬해인 61년 3월 31일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정기간행물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 41종에서 112종으로, 일간 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 주간 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었다. 사무실 한 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실업자 서너 명만 모으면 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었다.

대학가도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소설 ‘무진기행’으로 한국문학의 감수성을 혁신시켰다는 평을 듣는 소설가 김승옥(서울대 불문학과 60학번)이 2004년 펴낸 산문집 ‘내가 만난 하나님’에서 밝힌 당시 회고다.

‘4·19 후 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60년 5월 1일부터였는데,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열광적인 분위기는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학교 안을 지배했다. 특히 서울대 문리대가 가장 심했다. 정치과, 외교과, 사회학과 고(高)학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대강당에서 거의 매일 외부 인사, 주로 정치인들을 초청하여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 학생들은 강당으로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교수들은 아주 겨우 학생 몇 명만을 앉혀놓고 강의하거나 그나마도 학생들이 ‘휴강합시다’ 하면 휴강할 수밖에 없었다. ‘어용 교수’ 축출 운동을 벌임으로써 실제로 몇몇 교수를 쫓아내기도 했고, 일부 노(老)교수들은 (학생들이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지식인들도 제2공화국의 상황이 ‘무정부 상태’라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정치학자 서석순은 4·19 1주년을 맞아 사상계에 쓴 글(이병국 ‘대통령과 언론’에서 재인용)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국민들 사이에는 배반당한 4·19 자유혁명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만연되고 있다. 잃었던 자유만 도로 찾으면 만사가 해결되고 이 땅에 하루아침에 지상천국이 출현하리라고 국민들은 기대하였다. 자유로이 행사된 투표권에 의해 선출된 정부는 최단시일 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현명하고 과감한 지도력으로 국민들이 더 잘살 수 있는 새 질서를 확립해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와 실현 사이에는 너무나 먼 거리가 있다. 자유? 그렇다. 이 땅에 자유가 범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국민들이 (당초) 기대했던 어떤 질서 내에서의 자유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횡행하는 자유는 ‘배고픈 자유’ ‘실업의 자유’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받는 자유’ 그리고 ‘데모하는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국민들이 기대했던 자유가 아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