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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다산길

한강나루길을 걸어서 다산생가 마재마을까지 1

다산생가인 마재마을 방문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시간이 맞지 않았거나 지쳐 있었거나 하는 그런 이유에서였다.

기필코 가봐야 하겠다는 얘기를, 걷는 여행을 주도하고 있는 후배한테 해서

이번에 또 다산길을 걸을 수 있었다.

참고로, 남양주 다산길이라는 큰 틀 속에 작은 구간별로 나누어지는 이름 중에

또 다산길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번에는 전라남도 강진에서 올라 오신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의 고조모가

다산 선생의 따님이시다.

이름이 윤동욱(?)이라는 분으로 기억을 하는데 사진을 찍거나 잠시 다른 곳에 정신을 팔면

놓치는 순간들이 많았다.

강진에서 오신 귀한 분외에도 남양주시청의 공무원들의 다산연구회 여유당의 회장분도

찐빵과 김밥을 사서 중간에 우리를 마중나오셔서 너무 고마웠으며

다산문화연구원장이신 김남기 선생께서 마재마을 다산생가에서

거의 강의에 가까운 다산에 대한 말씀을 해주셔서 정말 더없이 유익하고 소중한 여정이었다.

청량리역에서 공사중인 현장을 보니 신기했다. 국철구간으로 올라 왔으므로 당연히

공사장비의 출입이 가능한데도 늘 지하철이라는 인식이 지하에 들어와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지붕도 있고 하니 더욱 그렇다.

오후 1시에 모이기로 했는데, 선배하고 연락을 해서 제1구간인 한강나루길을 始點에서

걸어 보자고 하여 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로 가기 위하여 역 구내를 빠져 나왔다.

덕소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단체로 움직이는 나길도회원들은 한강나루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덕소역에서 강변으로 내려 가서는 바로 다산마을을 향하여 걷기 때문에 구간을 완주한다는

의미가 약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국 제1구간을 다 걸은 것도 아니고 다산생가를 가기 위해서는 제1구간을

거의 다 걸은 지점에서는 제2구간인 다산길로 갈아타야 마재마을로 갈 수가 있어서

의미는 다음에 제대로 찾아봐야 하겠다.

강변으로 가기 위해서 걸으면 이런 이정표가 보이는 횡단보도가 나온다.


내려서서 오른쪽으로 향했다. 한강시민공원 삼패지구가 시작점이다.



이게 시작점이구나.


아이들이노는 수영장. 참 평화로워 보였다.


남양주는 다산길이 총 13개 구간으로 구성하고 있다.

남양주시를 훑어 간다.


덕소역에서 만나는 시간이 오후 1시이므로 적당하게 걷다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축구장이 보이는 이 지점에서 다시 덕소역 방향으로 돌아 섰다.



제1구간 한강나루길에서 출발한 시간은 12시 23분이다.



이게 팔당대교인가? 경춘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다리인지 모르겠다.

(검색을 해보니 이것이 미사대교구나. 저 건너편이 미사나들목이고

이 쪽에 덕소삼패나들목이 있다)



고등학교 9회 선배이신 장성철 선배님


한강에 고래가 나타났다 ㅎㅎ


개망초같이 생겼는데 색이 노래서 이상타 했었던 꽃인데 금불초였다.



덕소역에서 바로 내려오는 한강변에 17분만에 도착하였다.


덕소역 구내에서 나길도 회원과 페이스북 회원들을 만나기로 했으니

다시 구내로 향한다.

도보여행을 주도한 후배 복민과 회원분들의 얼굴이 보인다.




후배 복민과 나길도회원인 남박사님


덕소역 2번출구 밖으로 나와서 여정을 소개하고 각자 인사를 한다.




사진 왼쪽에 머리를 만지고 계시는 분이 바로 강진에서 오신 다산 따님의 고손인

윤동욱(?)선생.






자 이제 출발 1시 7분.


한강이 시원하다.


저건 팔당대교다.


검단산이 우뚝 서서 위엄있게 다가온다.


새빨간 잎이 신기하여 담아 봤다.


덕소역에서 기다렸는데 보이지 않던 후배가 자전거를 타고 합류를 했다.

동서울에서 15킬로미터를 달려 왔다고 한다.

1단밖에 먹지 않는 자전거를 주부들이 타듯이 나지막하게 내려 앉힌 안장에 올라타서

열심히 달려 왔으리라.

나중에 안장을 좀 높이라고 했는데 그러고 나니 좀 편해졌다고 했다.

아침에 테니스도 4판을 치고 나왔다고 하니 체력은 엄청난 친구다.

고위공무원인데도 백수선배를 무시하지 않고 잘 대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후배지만 늘 공부하는 자세를 보면, 정말로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자랑스럽기도 하고.


팔당대교 아래에서, 자세를 잡아 보라고 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주웠다는 저 고물자전거에

달려있는 자물쇠도 비밀번호를 몰라서 풀지 못하고 있다. 웃기는 상황이다.

팔당대교 지나고 나서는 곧 이어 도로로 올라와서 다시 내려가며 휴식을 취한다.



왼쪽은 나길도 회원이신 호문님이시고 다산따님의 고손자 신분이고

중간에 계신 분은 남양주시청의 다산연구회장이신데 김밥과 찐빵으로 우리 일행을

기쁘게 해주셨다. 오른쪽이 후배 복민이, 이 도보를 주관하고 있는 친구.


왼쪽은 고등학교 선배



마치 불이 난 듯



선배의 모자우산이 재미있다.


강변은 차량에 양보하고 이젠 길을 건너 차도변으로 걷는다.


저 위험한 곳에 이정표가 있는 건 웃기는 일이다.


이것도 이정표


금계국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노란코스모스(황화콧모스)의 잎이다.

많이 갈라져 있다. 금계국의 잎은 평범해서 특색이 없다.

이건 다른 사람이 쓴 글에서 옮겨 온 것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철길이 10킬로미터나

이어졌다는데 그게 어쩌다가 아래와 같이 망가졌는지 너무 너무 아쉽다.

어쩌다가 저런 생각을 했는지.......

철길이 주는 낭만을 느끼려고 찾아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 그런데 이 분의 글 중에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그래서 길을 바꾸어 버렸나?

이분 너무 낭만이 없는 게 아닌가?

십여 분을 채 걷지 않아 깨달았다. 현실과 이상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철길을 오래 걸어본 사람은 이 길이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기차만 기운차게 달리게 하려고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알 수 있다는 얘기다. 침목과 침목 사이가 내 보폭보다 아주 미묘하게 좁아서 걷다보니 간격을 조절하면서 걷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다리가 짧은 내가 그러니 다리가 긴 사람들은 오죽할까.

보폭을 침목에 맞추려니종종걸음을 걷는 형국이고, 그렇다고 침목을 한 개를 건너뛰자니 가랑이가 터무니없이 벌어져서 힘들고. 침목 사이에 깔린 돌을 그냥 밟으면 되지만 그것도 여러 번 밟다 보니 걷기가 마냥 쉽지 않았다.

낭만은 역시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건가 보다. 그리고 꿈은 이루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깨지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철길 사이를 걷다 지쳐 철길을 벗어나 철길 옆에 돌이 깔린 길을 걸으니 발밑에서 돌들이 부딪히면서 비명을 질러대는데, 그 길 또한 오래 걷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길을 걸으러 온 것이 아니라 길이 걷기 나쁘다고 투덜거리려고 온 것 같다. 그렇다고 걷기를 중단할 만큼은 아니다. 그저 그렇더라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철길 옆에는 간간이 쉼터를 조성해 놓아서 걷다가 지치면 잠시 쉬어갈 수 있게 해놓았다. 그곳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를 적은 나무판을 설치해놓아 쉬면서 시를 읽은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철길 옆이나 아래로는 한강이 흐르고, 멀리 팔당댐이 보인다. 바람은 제법 쌀쌀하게 불었다. 철길은 속도를 붙여 빠르게 걷기 힘든 길이라 어쩔 수 없이 쉬엄쉬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콘크리트로 덮어버린, 낭만의 종언이 서글프다.




성채와 깃발이 생뚱맞다. 완성이 되고 나면 어울릴래나?


팔당댐의 수문이 몇 개 열려 있다. 퍼부어 내리치면서 다시 솟는 물폭탄이 세차다.


여덟 명의 선녀가 내려와 놀던 자리가 여덞 곳이나 있고 이 후 그 자리에 여덟개의 堂을

지어 놓았다고 해서 팔당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용이 되어 올라가려는 것을 여자가 봐서

부정을 타 강으로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 온다.

"바댕이"라는 다른 이름로도 불리었다.일제시기 전에는 바댕이라고 불렀고 그 후에는 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각대를 쓰지 않고 보호기둥 위에 사진기를 올려 놓고 팔당댐의 물살을 담으려다 보니

얼굴을 보호기둥 밖으로 내밀어야 했었다. 걸리버여행기.




한반도 지도를 닮았네.

오른쪽으로는 양수대교와 운길산이 보인다.










능내리로 접어 들면서 연못호수가 있는데 머루가 탐스럽다.

머루동굴이다.


이 사진은 웬지 작품냄새가 난다. 자화자찬인가?

낡은 배 한 척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황포돛배......

돛재는 솟아 있으나 황포는 간 데 없고 쓸쓸히 소용도 없는 연못에 외로이 떠있다.

멀리 예봉산허리를 구름이 침범하려 한다.

연못가 말뚝도 기울어져 있어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한적함에 이르러 생각을

멈추고 일행들에 많이 처져있는 발길을 재촉한다.


벌써 저만치 가서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


수줍게 피어난 연꽃이 곱다.


호문님이 다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계시는데 사진찍느라 잘 못 듣고 늦게 와서

제대로 못 듣고 해서 미안하고 아쉽다.





20분 쯤 더 걸어서 드디어 마재마을 다산생가에 도착을 했다.

여기에 남방입은 다산문화연구원장이신 김남기 선생이 마중을 해주신다.

부인은 유산밑에서 "저녁바람 부드럽게"라는 음식점을 하고 계셔서 뒷풀이를 거기서 했다.


실학연수. 처음보는 한자 "수"였다. 늪이라는 뜻이다.

실학의 연못이자 늪이라......본산이라고 표현한 것이겠지.


이 사진은 다산생가로 와서 기다리고 있던 초등학교 친구가 찍어준 것이다.

친구가 데리고 온 일행이 다음 날의 여행때문에 일찍 가는 바람에 이 친구도

저녁을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났다.

김남기 선생의 강의를 들었다는 의미만 새겼다.

그런데 뒷풀이가 일찍 끝나는 덕에, 친구한테 연락을 해서 양정역인가에서 내렸다.

한참 후에 나타난 친구의 차를 타고근처의 솔잎동동주 집으로 함께 가서

나머지 의식을 흐리도록 만들어 하루를 마감했다.

다산의 동상과 문도사. 다산의 시호가 문도공인데 문성공과 더불어 문인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호칭이라고 김남기 선생이 말씀을 해주셨다. 율곡선생이 문성공이라고 했다.

문도공은 글의 수준이 어느 척도까지 이르렀다는 것인데 경술국치 8월 29일 보름전에

주어져서 그에 걸맞는 대우가 당시에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산생가 여유당을 배경으로 교실이 열렸다.

김남기 선생의 강의는 물 흐르듯이 고요하고 이어지고 시간을 주유했다.

두물머리에서 하나로 되는 한강의 옛이름은 洌水인데 다산의 號다.

다산이라는 호는 생전에 쓴 적이 없는 것이나, 위당 정인보선생이 다산의 저술이 유배지인

강진에서 나왔는데 거기에 있던 산이 다산이라 그렇게 호칭을 했는데 이후 다산으로

후세에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다산은 열수와 俟庵이라고 하여 당대에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나 후대에 그런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에서 지었다고 한다.

여유당이라는 택호도, 머뭇거릴 여, 망설일 유 자를 써서 겨울에 살얼음판을 건너듯

늘 경계하고 신중한 삶을 살아야 하는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정조 사후 자신에게 닥칠

풍파를 알고 조심스런 삶을 사신 것이었다.

마재마을은 충청도 지방에 사시던 6대조인가 되는 분께서 이 고을의 이장에게 말안장을

선물하고 이 곳에 사람이 없는 터에 자리를 잡도록 허해 달라고 청해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회갑이 되었을 때 다산은 자신의 무덤에 가지고 갈 글을 쓴다.

그것이 광중본이다. 반면 집중본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문집에 넣는 것이라고 한다.






다함께 다산의 묘로 올라가서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좌측의 묘비는 제자들이 세운 것인데 두개가 있을 수는 없다 하여 가족들이

파묻은 것을 제자들이 다시 파내어 재판을 통하여 저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시기에 대하여 잘 듣지 못하여 검색을 하든지 다산에 관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의

글을 봐야 할 것 같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집이 다 떠내려 가서 1986년에 복원을 했는데

강진의 초당도 와당으로 복원했듯이 이 집도 너무 크고 화려하게 지어서

관광객들로부터 다산의 삶이 오해를 받는 형국이 되어 편치 않다는 설명을 들었다.





문도사 사당


다산기념관안에서 찍은 것인데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나와서 다산생가의 사랑방 밖의 현판을 보았다.








저녁바람 부드럽게 라는 식당의 안채인데 살림집이다.

예전에는 식당으로도 일부 개방을 했는데 여행객들이 밤새 고기굽고 마시고 하니

불편해서 이젠 아랫채만 식당으로 운영한다. 마침 윗쪽에 사위들이 놀러와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부러운 광경이었다.


여기는 식당










실학박물관 너머 구름이 가라앉아 있다.

저러면 비가 오지 않고 구름이 산에 떠 있으면 비가 또 온다는 신호라고

선배님이 장모님께 들은 얘기라고 귀뜸해 주셨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운길산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역에 도착하니 6분후에 기차가 온다고 해서 참으로 기분좋아 했던 기억이 난다.

다들 화장실로 쏜 살 같이 달려가서 퍼뜩 볼일들을 보고 열차에 올랐다.

남박사와 호문님이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