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랩

아름다운 여인 국립발레단 김주원

[Why] [김윤덕의 사람人] 뮤지컬·TV·모델까지… 대중스타로 뜬 발레리나 김주원

  • 김윤덕

    입력 : 2011.12.17 03:04 | 수정 : 2011.12.17 23:55

    나의 백조는 호수에만 머물지 않는다
    뒤틀리고 짓무른 발가락 족저근막염이라는 병도 얻었다
    춤을 추는 한, 고통 계속되지만 무대서 내려오지 않을 거다 완벽한 춤 추기 전에는…
    하이힐 신고 뮤지컬 했다 상반신 누드 찍어 욕도 먹었다
    난, 몸의 언어로 말 건네는 사람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르가 내 몸짓을 더 깊게 한다
    발 끝으로 살아가는 내게 도전의 끝은 없다

    춤추는 동안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토슈즈 안에서 상처는 덧나고 짓무를 것이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발을 보았다.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왜 춤을 추느냐고 물었다. “엄홍길 대장에게 왜 산을 타는지 물은 적이 있다. 엄 대장이 묻더라. 너는 왜 춤을 추느냐고….”

    김주원(34)은 2011년을 ‘발레의 해’로 만든 주역이다. 영화 ‘블랙스완’이 150만 관객을 불러들이고, 피겨여왕 김연아가 ‘지젤’을 들고 귀환했지만 국립발레단이 일으킨 발레 돌풍에 비하면 서막에 불과했다. 올 한 해 동안 국립발레단이 전국을 누비며 공연한 횟수가 총 150회. 김주원의 ‘지젤’은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발레뿐 아니다. 뮤지컬, 사진전, TV를 넘나들며 김주원은 대중 스타로 발돋움했다. “지방 공연 가면 완전 아이돌 대접 받는다”며 그녀가 깔깔 웃었다.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는 김주원의 발. 발끝 예술의 영광과 상처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연습벌레 김주원이 한 달 사용하는 토슈즈는 20여 켤레. 새처럼 날아오르기 위해 그녀는 매일 아침 혹독한 훈련을 한다.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2006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강수진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최고여성무용수상을 받은 한국발레의 자부심. 이듬해 상반신 누드촬영으로 파란을 일으켰지만, 한국 무용계를 이끌 파워리더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서른네살의 발레리나.

    8일 낮, 연습을 마치고 걸어나오는 김주원을 만났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올려 묶은 외모만큼이나 그녀의 답은 간결하고 직설적이었다.

    지금이 국립발레단 최고의 전성기

    ―매일 아침 연습인가.

    "1년 365일 변함없다. 인대가 늘어나거나 뼈가 부러지지 않은 이상 반드시 나온다. 기초공사는 중요하니까."

    ―힘든지, 연습 중에 혀를 다 내밀더라.

    "안 되는 테크닉 되게 하려고, 약한 걸 강하게, 부족한 걸 잘하게 만들려니 힘들지. 한계치에 다다른 모습 보여야 하니 연습실에 누가 오는 거 싫어한다. 지쳐서 혀도 내밀고, '아이 씨' 하면서 욕도 한다.(웃음)"

    ―중력을 거부하는 듯, 사뿐사뿐 날아오르는 동작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닌가 보다.

    "수면 위의 백조가 딱 우리다. 무대에서는 의상과 조명, 관객의 갈채까지 정말 화려하지만 물밑은 정반대다. 공연보다 리허설이 힘들어야 무대에서 자유롭다."

    ―발레 돌풍이 불었다. 인기를 실감하는지.

    "'지젤' 정기공연은 개막 2주 전 매진됐고 당일 오픈한 시야장애석까지 동이 났다. 지방 공연 가면 완전 아이돌 대접 받는다. 스토킹하는 아저씨들 때문에 괴롭다."

    ―김주원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에 배용준이 왔더라. 무대 뒤에서 인사 나누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잘 아는 소믈리에가 12명의 명사와 와인을 매치해 책을 썼다. 그 중 한 인터뷰이가 배용준씨라 안면이 있다. 그날 공연장에는 정명화 선생님, 배병우 선생님도 오셨는데 배용준씨만 부각돼 미안했다. 예술을 즐기시는 분 같더라."

    ―발레가 사랑받게 된 데 국립발레단의 역할이 컸다.

    "내년이 국립발레단 창단 50주년인데,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적 기량을 갖춘 무용수들이 나이대별로 포진하고 있고, 우리 창작발레가 국제무대에서 빛을 보고 있다. 문병남 선생님이 안무하신 '왕자 호동'은 이탈리아 공연에서 전석 매진에, 기립박수와 커튼콜을 받았다."

    ―지방공연에 대한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의 의지가 크다고 들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발레단이니 지방의 문화소외 계층을 찾아가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내년에는 '지젤', '백조의 호수' 등 전막 공연으로 더 많은 지방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단원들은 힘들겠다.

    "발레리나, 발레리노의 생명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무용수라면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서길 원한다. 나 역시 무대에 서지 않으면 불안하다.(웃음) 숨어 있는 무용수를 발굴하게 되는 것도 큰 소득이다. 공연이 1년에 150회나 되고 같은 작품을 두 군데 동시 공연할 때도 있으니 어린 무용수들이 기량을 발휘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지방 공연 가면 완전 아이돌 대접 스토킹 아저씨들 때문에 괴로워요"
    타고난 환상의 상체라인?
    긴 목에 툭 불거진 뼈 도드라진 팔꿈치… 내 몸은 콤플렉스 투성이 발레에 몸을 맞췄다
    무명의 설움을 모른다?
    볼쇼이 학교선 열등생 4시간 자며 독하게 연습했다 최고라는 말보다 최선 다한다는 칭찬이 좋다
    2011년은 '발레의 해'
    국립발레단 공연 150회 김주원 '지젤' 전회전석 매진 개그 프로 '발레리노' 인기에 주부·직장인도 발레교습 붐


    "제가 보기와 달리 허당, 헛똑똑이에요"하면서 김주원이 웃었다. 은퇴 후 계획을 묻자 내년 1월에 있을 공연 '4색여정'만으로도 벅차 은퇴 이후는 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다시 태어나면 발레는 안 한다고 했다. "새로운 거 도전 해야지요." /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발레붐을 업고 만들어진 개그콘서트 ‘발레리노’는 남자 무용수들을 희화화한 면이 있다.

    “재미있던데? 코미디니까 그냥 웃으면서 봤다. 사실 발레는 왕실에서 시작된 예술이다. 왕실 남자들이 입은 타이즈는 몸의 아름다운 라인을 보여주려 했던 궁정의상이다. 제대로 된 발레공연 보면 그런 선입견 사라진다. 사람의 몸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발레가 보여준다.”

    ―문화센터 발레교실에 중년여성들, 샐러리맨들이 몰려온다더라.

    “어떤 운동을 해도 빠지지 않는 살, 발레를 하면 2~3㎏이 훅 빠지니까. 손가락 사이, 발가락 사이에 숨은 살들이 다 빠진다. 몸에 잠자는 근육이 하나라도 있으면 발레를 할 수 없다.”

    ―마라톤, 미식축구 다음으로 힘든 게 발레라던데.

    “더 힘들지. 이쁜 척까지 해야 하니까. 숨이 턱에 차올랐는데 드라마를 해야 하니까.”

    낭만발레의 진수를 보여주는 '지젤'에서 춤추는 김주원. / 국립발레단 제공
    토슈즈 대신 하이힐을 신고…

    지난 2월 독설로 유명한 작곡가 방시혁이 김주원의 지젤을 관람한 뒤 트위터에 썼다. ‘무대를 차고 날아오르는 토슈즈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릴 만큼, 공기 중에 날아다니는 요정을 본 듯한 느낌. 평소 고급예술과 저급예술을 구분하는 것에 반대해왔지만 분명 더 정교하고 세련된 예술은 있다.’

    김주원은 “발레 너머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내 춤의 영감”이라고 말한다. 클래식 발레뿐 아니라 뮤지컬, 방송출연, CF와 사진 모델로 거침없이 활약하는 것이 그녀에겐 모두 “몸의 언어를 깊고 풍부하게 하려는 공부”다. 2007년 사진작가 김용호의 ‘몸’이라는 전시를 위해 단행한 상반신 누드촬영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김주원만이 벌일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래서인지 김주원의 춤엔 드라마가 있다.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외도’가 잦았다.

    “호기심이 많다. 별명이 ‘호기심 천국’이다.(웃음) 나는 몸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다. 발로 눈물을 표현해야 하고, 어깨로 환희를, 손가락 하나로 죽음을 암시해야 한다. 춤은 다른 예술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충만해야 한다. 몸짓 하나하나에 이야기를 담아내야 하니까.”

    뮤지컬 '컨택트'에 '노란 드레스의 여인'으로 출연한 김주원은 하이힐을 신고 탭댄스를 추었다. / 조선일보 DB
    ―뮤지컬 ‘컨택트’에서 토슈즈 대신 하이힐을 신고 춤추는 김주원을 두고 ‘튀고 싶어한다’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도태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을 싫어할 뿐이다. 거의 매해 호두까기 인형과 백조의 호수, 지젤을 공연하지만 매년 내 춤이 달라지고 깊어진다고 믿는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장르의 경험에서 얻은 자양분이 내 몸에, 무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35년의 삶이 곧 내 춤이다.”

    ―결국은 발레를 위해서라는 뜻인가.

    “나는 누구보다 일찍 발레단에 나와 몸을 풀고 연습한다. 테크닉, 연기력이 한 단계 한 단계 좋아지는 그 과정을 정말 사랑한다. 글 혹은 그림의 붓 터치만 봐도 작가의 연륜을 알 수 있듯이 나 또한 손짓 하나, 눈빛 하나, 어깻짓 하나하나에 나의 세계관과 철학이 들어가는 진짜 내가 담긴 춤을 보여주고 싶다.”

    ―상반신 누드 촬영으로 파문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 국립발레단의 일원으로 더이상 조직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

    ―누드는 물론 발레 자체를 성(性)의 상품화라고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게 정말 좋은 발레 작품 보여드리고 싶다. 2시간 동안 객석에 전달하는 에너지와 감동이 어떤 예술보다 강렬하다.”

    ―‘댄싱 위드 더 스타’라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명품 심사평’으로 인기를 누렸다.

    “그 프로는 한 번도 춤을 춰본 적 없는 마라토너 이봉주씨 같은 분들이 나와 걸음마부터 배워가는 과정이었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아니까, 감동했다. 춤을 추기 위해 새벽까지 연습하는 출연자들 보고 내가 더 큰 자극받았다.”

    내 몸은 콤플렉스투성이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발레영화 ‘블랙스완’은 치열한 배역 다툼, 완벽한 춤에 대한 갈망으로 정신분열증에 빠지는 발레리나의 이야기다.

    “과장된 면이 상당히 많다. 자해는 좀 심하더라.(웃음) 물론 공감 가는 부분도 있다. 감정적으로 원하지 않는, 혹은 표현하기 힘든 연기를 해야 할 때 스트레스가 많지. 누구나 주인공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맞고. 그래서 나도 울어봤고, 발레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으니까.”

    ―15년째 김주원과 함께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투톱을 이뤄온 김지영과는 운명의 라이벌이란 소릴 듣는다.

    “지영씨는 정말 좋은 동료이자 훌륭한 예술가다. 어릴 때 한순간은 서로 의식하며 예민해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존재만으로 든든한 동시대의 무용수다. 내가 힘들 때 그 마음 가장 잘 알아주는 게 지영씨다. 한번 미소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더라.”

    ―‘김지영의 발, 김주원의 손’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두 무용수의 체형이 다르고 춤의 특장이 다르다고 말한다.

    “개성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무대에서 연기할 때 신체의 어느 한 부위가 부각되진 않는다. 전체의 몸짓이 어우러져 감동을 주는 거지. 지영씨의 손 연기도 상당히 아름다울뿐더러, 나의 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발이 예쁘지 않은 건 맞다. 나는 탄력 있게 점프하거나 다리를 높이 드는 발레리나가 아니다. 그걸 나만의 연기력, 표현력으로 커버하려고 노력한다.”

    ―목에서 어깨, 팔로 이어지는 환상의 상체라인을 갖고 있다.

    “상체라인은 내 몸 최고의 콤플렉스였다. 팔꿈치는 파트너들이 무기라고 할 만큼 심하게 도드라졌고, 유난히 긴 목에 뼈는 툭 불거져 보기 싫었다. 물 흐르듯 아름다운 라인을 만들기 위해 남들보다 훨씬 더 팔꿈치를 돌리고 어깨를 뺀다. 고통스럽지만 해낼 수 있다. 지독하게 노력하면 장단점은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해진다.(웃음)”

    ―무용수들 간에 누가 오프닝을 하고 누가 클로징 무대에 서느냐를 두고 경쟁이 치열하다던데.

    “그런 일에 스트레스 받으면 작품에 어떻게 몰입하겠나. 내게 주어진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여 춤을 추느냐 때문에 고민할 시간도 모자라다. 누가 첫날 첫무대에 서는가는 정말 무의미한 고민이다.”

    ―평단은 김주원의 집중력, 연기력을 칭찬한다. 청순한 지젤부터 관능적인 카르멘까지 완벽하게 자신의 캐릭터로 탄생시키는 무용수라고 하더라.

    “나는 어떤 색깔도 흡수하는 한지가 되고 싶다. 요정이 되어야만 요정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창녀가 되어야만 카르멘을 연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작품과 작품의 배경, 그 시대 역사까지 샅샅이 훑고 체화한다. 음악도 내 몸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듣고 또 듣는다.”

    ―연기하기 정말 힘들었던 배역이 있었는지.

    “2006년 공연한 마츠에크의 모던 발레 ‘카르멘’. 내가 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야말로 어글리(ugly)한 연기를 하라고 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매캐한 시가 연기를 내뿜고, 누군가의 뺨을 때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러야 하고.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안무가를 찾아갔더니 벽을 보고 일, 이, 삼, 사 소리치는 것부터 연습하라며 쫓아내더라. 몰입하고 또 몰입했다. 아름다움이 보이더라. 환희가 느껴지더라. 그 작품이 내 발레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다. 표현의 영역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졌다.”

    볼쇼이발레학교의 미운오리새끼

    김주원은 부산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바이올린, 태권도, 육상까지 배우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야 ‘이거다!’ 하며 받아들인 게 발레다. 선화예중 2학년 때 떠난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 유학은 김주원이 세계적인 무용수로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볼쇼이를 우등졸업한 뒤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김주원은 ‘해적’의 메도사 역을 맡아 화려하게 데뷔, 2006년엔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는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을 받는다.

    ―꿈의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한 첫 한국학생이었다.

    “92년에 갔으니 개방된 지 얼마 안 돼 구소련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탈의실, 샤워실에 잠금장치가 없고, 전화기 한 대를 기숙사 몇백명 학생이 함께 썼으니까. 빵을 베고 자야 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후회할 수 없었다.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부려 간 유학이니.(웃음)”

    ―볼쇼이 시절은 즐거웠나.

    “볼쇼이는 발레만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프로페셔널 무용수를 키우기 위해 문학, 역사, 음악, 수학, 프랑스어, 영어까지 인문적, 예술적 소양을 키우는 이론수업이 너무나 많아서 러시아말이 안 되는 나로서는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러시아 아이와 무조건 방을 같이 쓰면서 말을 배웠다. 춤도 기본이 많이 딸리더라. 담임이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못하는 아이들은 그룹의 제일 가장자리에 세우는데 나는 늘 끝에 있었지. 그러다 점점 가운데로 이동했다. 우등졸업했다.(웃음)”

    ―지독하게 노력했다 보다.

    “하루 4시간 자면서 연습했다. 그때 습관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전기를 아껴야 하니 새벽에 몰래 홀에 들어가 불도 안 켜고 연습했다. 처음엔 눈도 안 마주치던 선생님이 나를 인정하기 시작하더라. 나중엔 엄마처럼 돌봐주셨다. 지금 그분이 지금 볼쇼이 학교 교장이 되었다.”

    ―볼쇼이 시절 빼고는 늘 남들보다 앞서 달렸다. 무명시절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경쟁을 싫어한다. 콩쿠르가 제일 싫다. 기록을 경신하는 거, 경쟁해서 1등하는 거, 정말 싫다. 1월 1일 아무도 발레단에 나오지 않는 휴일에 혼자 나와 음악 틀어놓고 춤출 때 가장 행복하다. 최고라는 말보다,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칭찬이 더 좋다.”

    ―그래도 입단 직후인 스물한 살부터 프리마돈나로 활약해와서 군무(群舞)를 추는 발레리나들의 심정을 이해하긴 힘들 것 같다.

    “철없을 땐 나만 잘 추면 되지 않나, 생각했다. 더 겸손했어야 하는데, 진심으로 내 주위의 무용수들을 사랑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작품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내 것 잘하기에만 급급했다.”

    ―김주원의 멘토는 누구인가.

    최태지 단장님. 발레뿐 아니라, 선후배 관계를 잘 해나가지 못해서 많이 혼났다. 내가 다른 장르를 탐험할 때, 누드사진 때문에 힘들어할 때 마음 터놓고 이야기 들어주고 격려해주신 분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닮고 싶고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부모님이다.”

    서른네살? 난 아직 꿈꾸는 발레리나

    ―2005년 족저근막염(발뒤꿈치 통증증후군)을 앓았다.

    “사형선고를 받은 듯했다. 토슈즈를 신기조차 버겁더라. 어떻게든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에 매일 열두 시간씩 재활운동과 치료에 매달렸다.”

    ―수많은 무용가와 운동선수들의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병증을 이기고 2006년 세계 최고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내겐 슬럼프란 없다. 연기로 인해 좌절하면 더 열심히 춤을 춰 이겨냈다. 그 과정이 즐겁고 신났다. 하지만 통증은 달랐다. 연습할 수조차 없으니까.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그래서 작은 기적을 만들어낸 자신이 대견할 뿐이다.”

    ―완치된 건가.

    “그렇지 않다. 춤을 추는 한, 토슈즈를 신는 한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김주원 정도면 세계적인 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브누아 드 라 당스 받고 몇 군데 제의가 왔지만 나가지 않았다. 어디서 춤을 추느냐보다 어떤 춤을 추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최고여성무용수상도 100% 메이드 인 코리아인 ‘해적’으로 받았다. 나는 대한민국 발레리나다.”

    ―젊은 세대이니 발레뿐 아니라 정치, 사회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 많을 것 같다.

    “투표는 꼬박꼬박 한다. 시민의,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려고. 그런데 무대 위 말고는 허당이다. 여태 운전면허가 없다. 도로주행에서 여섯 번이나 떨어졌다. 정치도 잘 모르겠다. 보기와 달리 의식을 가진 청년이 아니다.(웃음)”

    ―김주원에게 사랑이란?

    “예술가는 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야 한다. 다만 나는 결혼을 전제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언제고 사랑이 먼저다.”

    ―호흡이 잘 맞는 남자 무용수와 사랑에 빠지기 쉬울 것 같다.

    “호흡이 안 맞는 파트너와도 사랑에 빠진다.(웃음) 나와 주로 파트너를 이룬 친구는 김현웅이란 후배인데,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한때 연인이었던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이정윤과 내년 1월 ‘4색여정’이라는 공연을 함께한다. 쿨(cool)한 건가?

    “헤어졌지만 예술에 관한 한 서로의 좋은 지지자이고 비평가다. 서로의 작품을 항상 보러 다니고 조언해준다.”

    ―최근에 김주원을 감동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내 조카. 내 여동생이 낳은 생후 1개월 된 조카. 팔삭둥이라 중환자실 인큐베이터에 있었는데, 그 애를 보는 순간 울었다. 아프고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신기하게도 내 귀를 닮아, 제부한테 내 딸을 낳아줘서 고맙다고 했다.(웃음)”

    ―최근엔 사진 찍는 데 취미를 붙였다고 하더라.

    “단원들 연습하다 쉬고 있을 때 목 뒷덜미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찍는다. 닳고 닳아 널브러진 토슈즈도 찍고 지친 무용수의 굽은 어깨도 찍는다.”

    ―올해 ‘호두까기 인형’ 공연에는 출연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호두까기 인형은 신인들을 등용하기에 가장 좋은 작품이다. 13년 동안 주인공 마리를 연기했으니 이제는 후배들에게 넘겨주는 게 맞다.”

    ―크리스마스엔 특별한 계획 있나.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있겠지. 난 아직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가슴이 들뜨는 촌스러운 사람이다. 트리 만들고 캐럴 틀어놓고 혼자서 밤을 새운다. 언니들이 혀를 끌끌 찬다.(웃음)”

    ―존경하는 발레리나는 누구인가.

    “나보다 앞서 춤춘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

    ―좋은 춤은 어떤 춤인가.

    “진심이 담긴 춤. 슬픈 척이 아니라 진짜 지젤이 되어서 우는 춤.”

    ―정말 말랐다. 이슬만 먹고 사는 건가?

    “발레는 체력 소모가 큰 춤이다. 남자만큼 많이 먹는다. 대창을 좋아한다.”

    ―내년이면 벌써 서른다섯이다.

    “완벽한 춤을 추는 순간 무대에서 내려올 거다. 나는 아직 꿈꾸는 발레리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