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톱 가수 윤복희 "임신 때 독일 가서 낙태… 남진과 스캔들은 가짜"
입력 : 2012.01.23 15:38 | 수정 : 2012.01.23 16:18
“아버지, 오빠에 대한 상처로 평생 남자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이 또 있을까. 4세에 천재소녀로 데뷔해 7세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이 또 있을까. 4세에 천재소녀로 데뷔해 7세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마저 마약 중독자 수용소로 들어간 뒤 살기 위해 무대에 섰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 결혼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톱스타와의 스캔들로 결혼생활은 파경을 맞았다. 뒤늦게 가진 종교와 ‘뒤돌아보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불꽃같은 삶을 살아온 여자 윤복희를 만났다.
1963년, 세계적인 아티스트 루이 암스트롱이 내한했다. 당시 워커힐이 개관하면서 마련한 초청공연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꼬마가수 한 명을 찾았다.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군인들로부터 미8군에 있는 어떤 가수가 자신의 노래를 곧잘 흉내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내가 노래할 테니, 미스 윤이 따라 해봐요.”
루이 암스트롱은 꼬마 가수에게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손수건과 트럼펫을 쥐게 하고,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엇박자로 한 소절씩 이어지는 노래를 마치자마자 그는 소리쳤다.
“어메이징! 뷰티풀! 좋아요, 나와 함께 공연합시다!”
그녀는 루이 암스트롱 공연의 게스트가 아니었다. 오프닝부터 피날레까지 모든 노래를 한 곡 한 곡 주고받으며 공연을 이끌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는 꼬마 가수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우면서 “브라보!”를 외쳤다. 천재소녀라 불리던 꼬마 가수 미스 윤, 윤복희다.
4세에 데뷔, 7세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다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연은 윤복희가 기억하는 생의 가장 반짝이는 추억 중 하나다. 그녀는 간증 자서전 《저예요, 주님》을 집필하며 지난 60여 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쓰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많았으니까요. 두 번은 이렇게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필을 마치고 민감한 부분을 빼는 작업만 7개월이 걸린 것 같아요. 당시 이랬겠다고 추측할 수 있는 장면이나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간은 삭제했어요. 5%만 남겨뒀죠. 나머지 95%는 저만 기억하고 있으려고요.”
윤복희의 아버지 윤부길은 코미디, 연극, 뮤지컬, 오페라를 제작했으며, ‘부길부길 쇼단’을 만들어 단장으로 활동했고 어머니 성경자는 최승희의 제자로, 배우였다. 그녀는 부모가 아닌, 극단 단원들 품에서 자라며 말보다 춤을 먼저 배웠다. 매일 보고 듣는 건 탭댄스를 추는 단원,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뮤지컬 팀의 안무연습이었다. 네 살이 되던 해 무대에 데뷔했고, 당시 아역배우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천재소녀 윤복희’로 불리며 무대와 영화 현장을 누볐다.
“부모 사랑은 전혀 못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으니 그게 내 삶이라고 생각했죠. 대신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터득했어요. 별명이 ‘찹쌀젤리(사람들에게 찰싹 달라붙는다고 해서)’, ‘좁쌀여우’, ‘쥐방울’이었어요. 오늘은 이 아저씨가 목말을 태워줬고, 내일은 이 언니가 잠을 재워줬죠.”
그러나 곧 불행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 수용소를 드나들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용소 비용을 대기 위해 전국 공연에 따라나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수용소를 드나들었고, 돌볼 사람 없는 어린 윤복희는 여관과 길거리를 전전하며 보냈다. 배고픔과 외로움에 싸워야 했고, 어린 나이에 자살 시도도 했다. 재미로 올랐던 무대는 살기 위해 오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됐다. 최초의 아역배우, 천재소녀는 하루하루 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일곱 살 때부터 제가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땐 무대에 서는 게 참 싫었죠.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이건 아니다.’ 하면서 항상 도망갈 곳을 찾았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 1호 미니스커트, 사랑에 빠지다
사랑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찾아왔다. 그녀의 전남편 독일계 한국인 유주용 씨다. 셜리 맥클레인 환영 공연에서 가수와 사회자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자주 만남을 가지며 사랑을 키워갔다. 당시 윤복희에게 유주용 씨는 오빠이자, 연인이자, 아빠 같은 존재였다.
이후 윤복희는 ‘코리안 키튼즈’로 필리핀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싱가포르를 비롯해 영국 등 유럽과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비틀즈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했다. 4년간 해외 활동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겨우 일주일의 휴가를 얻어 귀국할 수 있었다. 유명한 윤복희가 ‘대한민국 1호 미니스커트’라는 애칭을 얻은 건 바로 이때다.
“사람들은 제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고 기억하지만, 공항에서는 털 코트에 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며칠 후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앨범 재킷 사진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넣었죠.”
금의환향이었다.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리사이틀을 열어 대성공을 거뒀다. 유주용 씨와의 만남도 다시 이루어졌다. 그는 성공적인 리사이틀의 마지막 무대에서 윤복희에게 청혼했고, 깜짝 약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 후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다.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신혼집을 차렸습니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 손으로 직접 커튼이나 이불을 만들었고, 심지어 웬만한 가구도 직접 만들었죠. 제 삶에서 유주용 씨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이름이었어요. 그는 제 삶의 훌륭한 동반자였고, 남편이었고, 좋은 선생님이었죠. 그분을 통해서 저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갈등이 찾아왔다. 유주용 씨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했고, 독일어, 불어, 영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윤복희의 로드매니저로 동행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연예인 생활을 그만두고 평범한 여자로 살기를 바랐다.
“결혼하면 남편이 ‘이제 무대에 서지마. 집에서 살림해.’ 이럴 줄 알았어요. 저는 평범한 삶을 원했어요. 무대도 지겨웠고, 공연을 위해 짐도 그만 싸고 싶었죠. 그런데 남편은 제 재능을 높이 샀고, 제 로드매니저로 일했어요. 저는 결혼 전보다 더 많이 일하게 됐어요. 자존심이 있어서 속마음을 남편에게 말 못했던 것 같아요.”
남진과의 스캔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윤복희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활동 중에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매니저와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하면 곧장 낙태를 하는 일이 반복됐다.
“피임약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저 혼자 자랐기 때문에 그런 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임신을 하면 독일 국경에 가서 낙태를 하고 돌아왔죠. 그 수술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저는 바보였어요.”
더 나쁜 일도 일어났다. 유주용 씨는 어느 때부터인가 주변 남자들을 질투하고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스캔들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번은 가수 남진이 윤복희를 사랑한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보도됐다. 윤복희는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남편이 싫어서 홧김에 “나도 좋아한다”고 응수해버렸다고 한다.
“당시 유부녀였고, 서른이 넘었을 때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빠 일 문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됐고, 저희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분이 약혼을 하자며 다이아 반지를 가져왔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제가 그 반지를 받았고 그 자리에서 약혼을 하게 됐죠. 이 소식은 곧장 신문에 보도됐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결혼도 진짜가 아니었어요. 남편이랑 이혼도 안 했는데, 무슨 결혼이요?”
1963년, 세계적인 아티스트 루이 암스트롱이 내한했다. 당시 워커힐이 개관하면서 마련한 초청공연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꼬마가수 한 명을 찾았다. 한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군인들로부터 미8군에 있는 어떤 가수가 자신의 노래를 곧잘 흉내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내가 노래할 테니, 미스 윤이 따라 해봐요.”
루이 암스트롱은 꼬마 가수에게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손수건과 트럼펫을 쥐게 하고,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엇박자로 한 소절씩 이어지는 노래를 마치자마자 그는 소리쳤다.
“어메이징! 뷰티풀! 좋아요, 나와 함께 공연합시다!”
그녀는 루이 암스트롱 공연의 게스트가 아니었다. 오프닝부터 피날레까지 모든 노래를 한 곡 한 곡 주고받으며 공연을 이끌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는 꼬마 가수를 번쩍 들어 목말을 태우면서 “브라보!”를 외쳤다. 천재소녀라 불리던 꼬마 가수 미스 윤, 윤복희다.
4세에 데뷔, 7세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다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연은 윤복희가 기억하는 생의 가장 반짝이는 추억 중 하나다. 그녀는 간증 자서전 《저예요, 주님》을 집필하며 지난 60여 년의 시간을 되돌아봤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쓰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도 많았으니까요. 두 번은 이렇게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집필을 마치고 민감한 부분을 빼는 작업만 7개월이 걸린 것 같아요. 당시 이랬겠다고 추측할 수 있는 장면이나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간은 삭제했어요. 5%만 남겨뒀죠. 나머지 95%는 저만 기억하고 있으려고요.”
윤복희의 아버지 윤부길은 코미디, 연극, 뮤지컬, 오페라를 제작했으며, ‘부길부길 쇼단’을 만들어 단장으로 활동했고 어머니 성경자는 최승희의 제자로, 배우였다. 그녀는 부모가 아닌, 극단 단원들 품에서 자라며 말보다 춤을 먼저 배웠다. 매일 보고 듣는 건 탭댄스를 추는 단원, 악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뮤지컬 팀의 안무연습이었다. 네 살이 되던 해 무대에 데뷔했고, 당시 아역배우라는 말조차 생소할 때 ‘천재소녀 윤복희’로 불리며 무대와 영화 현장을 누볐다.
“부모 사랑은 전혀 못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으니 그게 내 삶이라고 생각했죠. 대신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법을 터득했어요. 별명이 ‘찹쌀젤리(사람들에게 찰싹 달라붙는다고 해서)’, ‘좁쌀여우’, ‘쥐방울’이었어요. 오늘은 이 아저씨가 목말을 태워줬고, 내일은 이 언니가 잠을 재워줬죠.”
그러나 곧 불행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 수용소를 드나들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용소 비용을 대기 위해 전국 공연에 따라나섰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이후에도 아버지는 수용소를 드나들었고, 돌볼 사람 없는 어린 윤복희는 여관과 길거리를 전전하며 보냈다. 배고픔과 외로움에 싸워야 했고, 어린 나이에 자살 시도도 했다. 재미로 올랐던 무대는 살기 위해 오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됐다. 최초의 아역배우, 천재소녀는 하루하루 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일곱 살 때부터 제가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땐 무대에 서는 게 참 싫었죠. 저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이건 아니다.’ 하면서 항상 도망갈 곳을 찾았던 것 같아요.”
대한민국 1호 미니스커트, 사랑에 빠지다
사랑은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찾아왔다. 그녀의 전남편 독일계 한국인 유주용 씨다. 셜리 맥클레인 환영 공연에서 가수와 사회자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자주 만남을 가지며 사랑을 키워갔다. 당시 윤복희에게 유주용 씨는 오빠이자, 연인이자, 아빠 같은 존재였다.
이후 윤복희는 ‘코리안 키튼즈’로 필리핀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싱가포르를 비롯해 영국 등 유럽과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하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비틀즈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했다. 4년간 해외 활동이 계속됐다. 그러던 중 겨우 일주일의 휴가를 얻어 귀국할 수 있었다. 유명한 윤복희가 ‘대한민국 1호 미니스커트’라는 애칭을 얻은 건 바로 이때다.
“사람들은 제가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고 기억하지만, 공항에서는 털 코트에 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며칠 후 패션쇼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앨범 재킷 사진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진을 넣었죠.”
금의환향이었다.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귀국 리사이틀을 열어 대성공을 거뒀다. 유주용 씨와의 만남도 다시 이루어졌다. 그는 성공적인 리사이틀의 마지막 무대에서 윤복희에게 청혼했고, 깜짝 약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결혼 후 함께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다.
“유럽 순회공연을 마친 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신혼집을 차렸습니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 손으로 직접 커튼이나 이불을 만들었고, 심지어 웬만한 가구도 직접 만들었죠. 제 삶에서 유주용 씨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이름이었어요. 그는 제 삶의 훌륭한 동반자였고, 남편이었고, 좋은 선생님이었죠. 그분을 통해서 저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갈등이 찾아왔다. 유주용 씨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했고, 독일어, 불어, 영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럼에도 그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윤복희의 로드매니저로 동행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연예인 생활을 그만두고 평범한 여자로 살기를 바랐다.
“결혼하면 남편이 ‘이제 무대에 서지마. 집에서 살림해.’ 이럴 줄 알았어요. 저는 평범한 삶을 원했어요. 무대도 지겨웠고, 공연을 위해 짐도 그만 싸고 싶었죠. 그런데 남편은 제 재능을 높이 샀고, 제 로드매니저로 일했어요. 저는 결혼 전보다 더 많이 일하게 됐어요. 자존심이 있어서 속마음을 남편에게 말 못했던 것 같아요.”
남진과의 스캔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 일어나기 시작했다. 윤복희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활동 중에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매니저와 계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신을 하면 곧장 낙태를 하는 일이 반복됐다.
“피임약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저 혼자 자랐기 때문에 그런 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임신을 하면 독일 국경에 가서 낙태를 하고 돌아왔죠. 그 수술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저는 바보였어요.”
더 나쁜 일도 일어났다. 유주용 씨는 어느 때부터인가 주변 남자들을 질투하고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스캔들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번은 가수 남진이 윤복희를 사랑한다는 기사가 한 신문에 보도됐다. 윤복희는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남편이 싫어서 홧김에 “나도 좋아한다”고 응수해버렸다고 한다.
“당시 유부녀였고, 서른이 넘었을 때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빠 일 문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됐고, 저희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분이 약혼을 하자며 다이아 반지를 가져왔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제가 그 반지를 받았고 그 자리에서 약혼을 하게 됐죠. 이 소식은 곧장 신문에 보도됐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결혼도 진짜가 아니었어요. 남편이랑 이혼도 안 했는데, 무슨 결혼이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했고,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그때 느낀 게 ‘내가 정말 큰 실수를 했다’는 거였죠. 그분(남진)에게 집까지 모두 주고, 딱 30만 원만 주머니에 넣고 나왔어요.”
당시 윤복희와 남진의 스캔들은 오랫동안 화젯거리였다. ‘남진이 윤복희를 이용했다’, ‘남진이 윤복희를 폭행했다’ 등 각종 루머도 떠돌았다. 이에 대해 윤복희는 지난해 <황금어장-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남편과 다툰 후 홧김에 결혼했다. 순진한 남자의 마음을 이용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윤복희는 전남편을 회상하면서 “남편은 나를 아끼고 사랑해줬는데, 정작 나는 마음의 문을 5%밖에 열지 못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아버지와 오빠… 그녀에게 남자란 실망만 안겨주는 존재였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하게 했던 남편도 결국은 다르지 않았다.
“학교에 가려고 서류를 떼보다가 알게 됐어요. 출생신고가 안 되어 있었던 거예요. 그때 부모님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느꼈어요. 아버지는 아내가 따로 있었고, 어머니는 호적에 시집도 안 간 처녀로 되어 있었어요. 아버지가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으면 어머니가 돈 벌러 떠나서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있었어요. 아버지라는 존재가 제게 좋을 리 없었죠.”
오빠 윤항기도 마찬가지였다. 해외로 떠나기 전 윤복희는 미8군에서 활동하며, 열네 살의 나이로 집을 샀다. 명의는 오빠 이름으로 했다. 귀국해보니, 집은 이미 팔린 뒤였다. 이듬해 공연을 계약하고, 미리 돈을 받아 다시 집을 사줬다. 게다가 오빠는 연예계 활동을 하며 동생에게 종종 의지했다.
“아버지 다음으로 실망을 준 사람이 오빠였어요. 왜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런가 하는 회의가 들었죠.”
항상 도망갈 구실만 찾아온 윤복희는 이제 도망가지 않는다. 종교를 가지면서부터다. 그 순간, 그동안 지긋지긋했던 무대가 소중하게 다가왔고, ‘내 재능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구나.’라고 느끼게 됐다. 절망의 끝에는 항상 ‘그분’이 계셨다. 후두암과 자궁암에 걸려 생사를 오가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그래도 아빠, 오빠에 대해 “용서? 그런 건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녀가 터득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은 것’. 윤복희에게 인생은 오늘의 무대와도 같다. 막이 내린다고 끝이 아니다. 내일의 무대가 있다.
윤복희의 오빠 윤항기는?
우리나라 최고의 록 밴드라고 할 수 있는 ‘키보이스’의 멤버이며 1959년 ‘정든 배’로 데뷔했다. 1974년 솔로 활동을 시작해 ‘별이 빛나는 밤에’,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어떡하라고’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979년에는 자신이 작곡한 ‘여러분’을 동생 윤복희가 불러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싱어송라이터로 각종 국제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이름을 날리던 중 인생의 방향을 전환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20년간 예음음악신학교의 총장이자 예음교회의 목사로 활동하며 ‘노래하는 목사’로 윤복희와 듀엣 무대를 마련하는 등 음악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저예요, 주님》(윤복희,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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