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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바둑 이야기-중앙일보에서 가져 옴

바둑은 전혀 못 두지만 학생시절에 박치문씨의 관전평이 너무 재미 있어서

바둑복기는 보지 않고 관전평만 읽은 기억이 난다.

이 양반이 원래 조선일보인가 한국일보에 연재를 했는데

중앙일보로 옮겼었구만.

그 당시에도 이미 어딘가로 옮긴 것은 같았다.

[뉴스 클립] 바둑이야기-제1회 응씨배 결승전 ①

[중앙일보] 입력 2011.09.28 00:01 / 수정 2011.09.28 00:01

종주국 신흥고수 녜웨이핑, 바둑 변방의 강자 조훈현과 만나다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攝衛平) 9단의 제1회 응씨배 결승전은 언제나 ‘운명’이란 두 글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당시 한국 바둑은 가난한 변방의 약자였고 조훈현은 그 수령이었다. 녜웨이핑은 종주국 중국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신흥 고수였다. 이 둘이 수백 년 무공으로 쌓아 올린 일본 바둑의 성채를 뚫고 결승에서 만난 것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고 판타지였다. 처절한 혈투 끝에 조훈현은 응씨배를 품에 안는다. 일본은 조훈현의 우승을 일회성 해프닝이거나 지나가는 소나기쯤으로 치부했지만 결국 이것으로 역사는 바뀐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1980년대 상황

잉창치배 세계바둑대회를 만든 대만 재벌 잉창치(應昌期)씨.
일본에서 초단 면허를 받아온 조남철 선생은 한국 바둑의 대부가 됐지만 8단이나 9단 승단을 스스로 기피했다. 일본의 실력자들과 같은 단에 오르는 건 ‘불경’이라고까지 생각했다. 1970년대 종로 한국기원에 가면 사카다(坂田榮南)와 후지사와(藤澤秀行), 린하이펑(林海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되곤 했다. 그 뒤를 이어 이시다(石田芳夫)-가토(加藤正夫)-다케미야(武宮正樹) 삼총사와 조치훈-고바야시(小林光一) 라이벌의 등장까지, 일본 바둑은 마치 신들의 세계처럼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 실력적으로 그만큼 월등했고 정신적으로 한국을 압도했다. 국내 모든 기사들이 일본의 수법을 모방했고 일본의 정석을 암기했다. 일본 유학파들은 차례로 한국을 지배했다. 일본 바둑은 한국 바둑의 ‘사범’이었다. 한국은 69~71년. 일본과 세 차례 교류전을 해 4승20패를 기록했다. 아마추어까지 낀 일본 팀인데도 한국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교류전’은 끊어졌다, 한국기원은 일본기원의 이사가 서울에 나타나면 공항에서부터 귀국 때까지 극진히 모시며 교류전을 부탁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일본은 대신 중국과 교류전을 시작했다.

중국 바둑은 문화혁명 때 박해를 받고 지하로 숨어들었으나 덩샤오핑(鄧小平)이 실권을 잡으며 되살아났다. 일본과 중국의 일류기사가 단체전으로 맞붙는 중-일 수퍼대항전이 84년 시작됐고 여기서 녜웨이핑이란 대스타가 탄생했다. 그는 당시 한국기사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일본의 최강자들에게 무려 11연승을 거둔다. 중국은 녜웨이핑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8대7, 9대8, 9대8로 3년 연속 이긴다.

#녜웨이핑과 중국 바둑

녜웨이핑
중국에서 조조(曹操), 한신(韓信) 등 난세의 역사적 인물들은 거의 다 바둑 고수로 묘사된다. 멀리 당나라 때부터 황제의 바둑 사범을 맡는 ‘기대조’라는 공직도 있었다. 궁중 여성들도 바둑을 두었다. 서태후가 바둑 두는 모습은 지금도 그림으로 남아있다. 중국인의 바둑에 대한 자부심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미 남송(南宋) 때 바둑의 기본 원리를 담은 위기십결(圍棋十訣)을 만들었고 원(元)대에는 황제의 명에 따라 현현기경(玄玄棋經)을 펴냈다. 1946년 공산혁명 직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천이(陳毅) 부총리는 “바둑이 흥하면 국운도 흥하고 바둑이 쇠하면 국운도 쇠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바둑을 장려했다(베이징의 중국기원에 가면 그의 동상과 위의 문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과 함께 바둑은 다시 지하로 들어간다. 바둑은 ‘악취 나는 유산’으로 분류돼 탄압받았고 막 이름을 날리던 녜웨이핑은 멀리 헤이룽장(黑龍江)성으로 끌려가 농장의 돼지우리 당번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머리를 박박 깎인 채 가슴에 반동분자 팻말을 달고 끌려다녔다. 녜웨이핑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농장의 생활은 지옥 같았지만 그곳 광활한 평원에서 낙조를 지켜보며 나는 두 가지 큰 선물을 받았다. 대자연의 신비한 장관 앞에서 슬픔과 외로움, 은혜와 원수 등은 하잘것없었다. 나는 시련 속에서 투지와 끈기를 배웠고 대자연 속에서 심성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다.”

문화혁명이 끝나고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열리면서 일본은 중국에 바둑외교를 펼친다. 일본의 많은 고수들이 중국에 가 바둑을 지도했고 드디어 중·일 수퍼대항전이 시작됐다. 87년 11연승을 해낸 녜웨이핑이 귀국할 때는 고위 당국자들이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중국의 자존심을 세운 녜웨이핑은 국민적 영웅이 됐고 덩샤오핑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정부로부터 ‘기성(棋聖)’ 칭호를 받았다. 우칭위안(吳淸源) 이래 살아있는 사람에겐 결코 쓰지 않았던 ‘기성’이란 칭호를 녜웨이핑이 차지한 것이다. 그리고 서열 400위 안에 드는 고위직 공산당원이 됐다.

훗날 돌아볼 때 녜웨이핑이 돼지우리 당번 시절의 초심을 잊지 않았더라면 조훈현은 녜웨이핑을 꺾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녜웨이핑은 그만큼 강했다. ‘철의 수문장’이라는 별명 그대로 묵직하면서도 두터운 기풍의 그는 후반으로 갈수록 강해진다. 하지만 그는 이제 기성이 됐고 권력의 측근이자 고위직이 됐다. ‘교만’이라 불리는 승부의 천적이 그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녜웨이핑은 또 굉장한 술꾼이다. 점심 식사 중에 40도가 넘는 독주를 한 병씩 마신다.

#조훈현과 한국 바둑

조치훈 9단의 명인 쟁취 기념으로 조치훈(왼쪽) 대 조훈현의 기념대국이 1980년 12월 31일 롯데호텔에서 열려 조치훈의 승리로 끝났다. 술을 한 방울도 못 하는 조훈현 9단은 이날 밤 소주 두 잔을 마시고 대취했고 앞이 안 보여 골목을 기어 여관까지 가야 했다. 그 상처는 훗날 세계 제패의 숨은 동력이 됐다. 당시의 사진은 거의 조치훈 위주로 촬영해 조훈현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중앙포토]
조훈현은 9살 때 프로가 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세계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일본에 유학한 뒤 5년의 노력 끝에 14세 때 다시 프로가 된다. 조훈현은 자유분방한 소년이었지만 엄격한 스승 세고에 9단의 집에서 ‘내제자’로 살며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한다. 그가 ‘실전 스승’이라 할 후지사와 슈코 9단을 만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후지사와는 ‘괴물 슈코’라 불리는 사람. 바둑은 어마어마하게 강했으나 술독에 빠져 살았고 경마·경륜 같은 도박으로 상금을 탕진했다. 슈코가 낸 복덕방은 담배 연기 자욱한 젊은 강자들의 놀이터였고, 여기서 조훈현은 바둑뿐 아니라 마작 같은 놀이도 배운다(조훈현이 대국 중 다리를 떤다든지 중얼거리는 습관 등은 아마도 여기서 얻은 것이리라). 조훈현은 1972년 군 복무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것이 한국 바둑을 크게 업그레이드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그는 김인 시대를 종식시키고 서봉수라는 유일한 라이벌과 ‘조서(曺徐) 시대’를 열었다. 서봉수 9단의 완강한 저항을 누르고 조훈현은 세 차례에 걸쳐 국내 타이틀을 모두 휩쓰는 ‘천하 통일’을 달성한다.

하지만 아무리 타이틀을 휩쓸어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조훈현은 목표를 잃었다. 내일이 도전기인데도 밤을 꼬박 새우며 ‘놀이’를 즐기다가 오전 9시에 대국장으로 달려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다가 조치훈이 일본에서 명인이 됐다. 4년 후배 조치훈의 명인 타이틀 쟁취 소식은 모든 일간지 1면을 톱기사로 장식했다. 조훈현의 국내 11개 타이틀 ‘전관왕’ 소식은 구석자리 단신이었다. 이 차이가 바로 한국 바둑의 현주소였다. 1980년 금의환향한 조치훈과의 두 차례 대국에서 조훈현은 연패를 당한다. 사람들이 소곤거렸다. “상대가 안 되네. 조치훈은 대국 자세도 참 훌륭하더라.”

술을 한 방울도 못하는 조훈현은 80년 12월 31일 밤,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종로에서 소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대취했다. 앞이 안 보여 벽을 붙들고 기어서 여관에 도착했다. 슈코의 말 그대로 한국 바둑은 ‘진흙 밭’에 불과했다. 깊은 슬픔, 깊은 상처가 그를 훑고 지나갔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조훈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새롭게 투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대결 전야

‘누가 세계 최강자인가’.

이 질문이 느닷없이 1986년과 87년의 바둑계를 풍미했다. 중국은 중·일 수퍼대항전에서 11연승을 거둔 녜웨이핑을 ‘1위’로 생각했으나 일본은 “그건 진검승부가 아니다”며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일본기원이 발행하는 잡지에서 ‘세계 10걸’이 발표됐는데(표 참조) 1위 고바야시, 2위 조치훈, 3위 다케미야였고 조훈현은 6위, 녜웨이핑은 8위였다. 조훈현에 대해서는 “재기 넘치는 바둑. 군 때문에 귀국한 것은 조에겐 오히려 다행일 것이다” 했고, 녜웨이핑에 대해선 “잘 두나 아직 거칠다. 종반은 상당히 세다. 그런대로 베스트 10에 든다”고 적었다. 1988년 2월 도쿄에서 세계대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대만 재벌 잉창치(應昌期)씨가 거액의 상금을 건 세계대회를 만든다는 소식이 들리자 현대 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일본이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그것이 바로 제1회 후지쓰배 세계선수권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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