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밝히는 사실 -6 신동아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2015. 4. 6. 15:24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 6]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청와대에 보고된 쿠데타설

 

청와대도 5·16 쿠데타와 관련해 드라마에 비교될 수 있을 만큼 적지않은 비화(秘話)를 간직하고 있다. 처음으로 청와대에 군대의 거사설을 전한 사람은 윤대통령과 같은 민주당 구파 소속의 신민당 위원장 김도연 의원이다.

 

김도연 위원장은 신중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쿠데타 발생 전해인 1960년 12월경 청와대를 방문해서 군의 ‘동요설’을 대통령에게 알렸다. 김도연 의원은 자기와 잘 알고 지내는 김대령이 집으로 찾아와 “3·15 부정선거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 미숙과 신·구파의 파벌싸움에 불만을 품은 일부 장교들 사이에서 거사 계획이 진행중”이라는 말을 했다고 대통령에게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연립내각을 주선했던 대통령으로서는 충격적인 정보였다. 대통령은 그날 즉시 장면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김도연 의원이 전한 얘기를 알리고 철저히 대처할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며칠후 장총리는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에게 알아보니 별일이 아니랍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고 보고했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은 더이상 어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문제의 김대령은 그후에도 계속 김도연 위원장과 접촉한 흔적이 있으며 5·16 쿠데타 주체세력의 일원으로 군사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다음으로 군대의 거사설을 구체적으로 알려온 사람은 심명구라는 사람이다. 심씨는 윤대통령이 종로에서 민의원에 출마했을 때 대통령의 선거운동을 도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심씨는 아들을 청와대 총무비서로 취직시킬 정도로 대통령과는 친한 사이기도 했다.

 

1961년 이른 봄 어느 토요일 오후. 대통령은 나에게 “내일 일요일인데 무슨 약속이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친구들과 낚시 약속이 있어 솔직하게 “낚시를 가려고 합니다”고 대답했다. 후에 알아보니 대통령은 우이동에 있는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박사 묘소에 나와 함께 갈 생각이었다. 내가 낚시 타령을 하니까 대신 김남 비서관이 따라갔다고 한다. 몇년 후 혁명주체인 유원식 대령이 발설해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윤대통령의 쿠데타 관련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남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조병옥 박사 묘소로 가던 도중 유림 선생(유원식 대령의 부친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대통령과는 지면이 있었고 해방후 귀국해 주로 농민을 위한 정당의 당수로 활약했음)의 삼우제가 진행되는 것을 알고 잠시 들러 유림씨의 아들인 유원식 대령의 인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의례적으로 상주에게 “시간이 있으면 청와대에 한번 들르게”라고 인사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통령은 유대령이 쿠데타 그룹의 일원인 것도, 그가 대통령과 친분 관계에 있는 심명구씨와 가까이 지내던 것도 알 리가 만무했다.

 

심명구씨는 대통령과 잘 알고 지낸다는 것과 아들까지 비서실에서 일하던 관계로 비서실에서는 모두 그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태도에는 어딘가 도도한 면이 엿보이기도 했다.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유원식 대령은 심씨가 대통령 댁을 무상 출입하는 것을 알고는 군대의 거사계획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부탁을 했다는 것이다.

 

“장도영 총장이 있으니…”

 

첫째, 거사자금을 마련해 줄 것. 둘째, 대통령을 쿠데타에 협조할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담한 육군대령이기도 했다. 어쨌든 유대령의 부탁을 받은 심씨는 “대통령 문제는 나한테 맡기시오”라고까지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후일 심씨는 유대령과 약속한 대로 군대 내에서 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과 유대령이 대통령을 한번 만날 것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대통령에게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역적행위와 같은 쿠데타를 하겠다는 사람이 쿠데타의 대상자이기도 한 대통령에게 거사계획을 말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심씨에 대해 “그런 불순한 마음(쿠데타 계획)으로 일을 저지를 사람을 내가 어떻게 여기서(청와대) 만날 수 있느냐? 그런 이야기는 두번 다시 입밖에 내지도 말고 그런 소리를 하려면 여기에 오지도 말라!”고 야단을 쳤다고 한다. 대통령은 심씨가 너무나 미덥지 않았기 때문에 그후 청와대 출입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심명구씨의 말을 들은 대통령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조재천 법무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군 내부에서 거사설이 들린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철저히 조사할 것을 당부했다. 며칠 후 조재천 법무부장관의 보고는 너무나 안일한 것이었다. “장총리나 국방부장관도 잘 알고 있는 일인데 대수롭지 않은 역정보라고 합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통령은 도리어 심명구씨를 ‘허풍선이 같은 사람’이라고 나무랐다고 한다.

 

김도연 당수의 경우나 심명구씨처럼 구체적으로 쿠데타 정보를 청와대에 보고한 사람이 그외는 없었지만 김상협 고려대 총장이나 백광하 동아일보 편집국장도 “군대가 불장난을 할 것 같다”는 항간의 풍설을 대통령에게 자주 전한 바 있다. 대통령은 이상한 정보를 들을 때마다 장면 총리에게 전하고 적절히 대처하도록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장총리의 답변은 그때마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 전부였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면 국무총리가 만인(萬人)을 제쳐놓고 오직 신뢰하고 의지했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군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중적(?)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박정희 소장이 5·16 쿠데타 드라마의 주연이라면 장도영 장군도 그 못지않은 배역을 맡은 인물이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5·16 쿠데타 훨씬 이전에 박정희 소장으로부터 서신으로 또는 인편으로, 그리고 5·16 전날 밤에는 전화로 쿠데타 계획을 통고 받은 사실을 5·16이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확실하게 본인의 입으로 시인했다.

 

MBC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그는 “서신을 받았으나 교회에 가느라고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고 전화를 받은 바 있는데 그가 술이 취해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알고 빨리 집에 가서 잠이나 자라고 했다”고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둘러댔다. 그리고 그는 “그들은(박정희 등 정치군인) 나를 배신했다”고 고백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장도영 장군이 내뱉은 ‘배신했다’는 말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장군에게 쿠데타 이전에 무엇을 약속했기에 오늘에 와서 ‘배신했다’는 말을 원망스럽게 하는 것일까? 박정희 소장이 지금 사망하고 없으니 진실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61년 6월3일 5·16 혁명이 성공을 거둔 다음,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주체들은 당시 최고회의 의장과 내각수반 등 수많은 감투를 씌워주고 이용했던 장도영 의장을 추방하기 위한 일차적 조치로 ‘최고회의 의장은 타직(他職)을 겸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비상조치법’을 예고 없이 개정해 버렸다. 자기를 거세하려는 것을 알게 된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은 크게 반발했으나 박정희 소장 일파는 그를 반혁명 죄로 구속해 재판에 회부했다.

 

당시 혁명재판에서 검사가 제시한 죄목을 보면 장의장은 비상조치법이 개정된 데 격분해 “너희들이 나를 로봇으로 만드느냐. 최고회의를 열어 신임투표를 하자”는 망언(?)을 했고 “혁명을 무엇 때문에 했느냐? 나를 배신하느냐?” “서울시내가 피바다가 된다. 불바다가 된다”는 ‘반혁명적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또다시 “박정희가 나를 배신했다”고 원망의 눈물을 흘리면서 텔레비전 화면에서 서슴없이 고백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배신했나 안했나가 아니다. 그보다는 장도영 참모총장이 자기를 하늘같이 믿었던 장면 총리를 배신했나 안했나가 중요한 것이다.

 

장도영의 눈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 계획을 정확하게 장면 총리에 전할 때마다 장총리는 “장도영 총장에게 물어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답변만을 되풀이하지 않았던가.

이제 분명해진 사실은 5·16 쿠데타와 관련해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가증스럽게도 이중 플레이를 했고 장면 총리는 장도영 총장에게 끝까지 속았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 말만 믿고 있다가 불행한 5·16의 아침을 맞았던 것이다. 청와대에서 본 쿠데타 드라마를 한층 더 보완하기 위해 장면 총리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희극적인 장면이 하나둘이 아니다.

 

민주당 소장파에 의해 여·순반란사건과 관련한 ‘오해’를 벗게 된 박정희 소장과 하극상사건에 관련돼 처벌될 위기에 처했던 김종필 중령이 자유의 몸이 돼 장면정권 타도를 목표로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을 무렵 4·19 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게 됐다.

 

장면 정부는 ‘4·19 폭동설’에 대비해 군에 대해 폭동진압훈련을 지시했다.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하는 쿠데타 세력은 만일에 폭동이 발생하면 그것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4·19 당일 폭동이나 데모가 없자 쿠데타 계획은 지하로 잠적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쿠데타 세력은 ‘행정반’과 ‘작전반’으로 조직을 정비해 ‘D데이’에 대비했다.

 

그런데 이러한 군대의 움직임이 당시 시경국장인 정태섭씨에 의해 포착됐다. 정국장은 직접 장총리를 방문해 자기가 입수한 정보를 보고했다. 그러나 장총리는 “유엔군이 건재하고 장도영 총장이 건재한 이상 절대로 걱정할 것 없다”는 회신을 보내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비화는 5·16 쿠데타를 며칠 앞두고 국회 모의원으로부터 박정희 장군이 육군에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면 총리는 직접 장도영 참모총장을 호출했다는 것이다. “어찌 된 일이냐?”는 총리의 추궁에 장도영 참모총장은 “내가 참모총장으로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더욱 박정희 소장은 그런 큰일을 할 인물이 못 됩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장총리는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비서를 시켜 장총장이 철저하게 조사를 하는지 살펴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총장이 특별히 조사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불안을 느낀 장면 총리는 측근을 시켜 쿠데타 3일 전인 5월13일 저녁 서울 화신(현재 국세청 자리) 뒤 모 요정에서 장총장과 만나게 해 쿠데타 풍설을 추궁하도록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장도영 장군은 “박정희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못 됩니다. 워낙 중상모략을 많이 받는 사람이니까 누군가가 모략을 하는 겁니다. 쿠데타는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확실한 답변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장면 총리는 오로지 장도영 총장 말만 믿고 있다가 5·16을 맞게 됐다. 5·16 새벽 2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투숙중이던 장면 총리는 “쿠데타가 발생했으니 빨리 피하십시오”라는 장총장의 전화를 받고 부인과 같이 허둥지둥 호텔 앞에 있는 주한 미대사관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현관에서 출입이 금지돼 급하게 안국동에 있는 미대사관 직원숙소로 달려가 피신을 요청했으나 거기서도 거절당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칼멜 수녀원’에 몸을 숨긴 채 5·16의 아침을 맞게 됐다.

 

나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자신있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면 정권의 몰락이 완전한 ‘타살’에 의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자살’에 가까운 ‘동반자멸’이냐 하는 의문이다. 후세의 사가들이 이 의문을 풀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끝)

 

김준하
발행일: 2001 년 11 월 01 일 (통권 506 호)
쪽수: 352 ~ 371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