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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박정희

바람처럼 구름처럼 2011. 2. 11. 02:57
젊은 날의 박정희
문경의 하숙생활
박정희 교사는 학교 바로 밑에 있는 김순아(金順牙)라고 하는 아주머니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는 남편을 잃고 임창발(林昌發)이라는 아들하나를 데리고 하숙을 치며 사는 여인인데 인정이 많고 성격은 남자처럼 호탕한 편이었다.
박 교사가 하숙에 든 다음 달에 문경군청의 농회(農會)기사인 허동식(許東植)이 하숙생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한 집에서 하숙을 하다보니 친하게 지냈고 퇴근 후면 술친구가 되었다. 당시의 생활에 대하여 허동식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왔다. 박 교사의 첫인상은 꾀죄죄했는데 눈빛만은 빛나고 다부진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곧 친숙한 사이가 되었고 매일 집에서 술을 마신 것 같다. 술마신 것이 기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걸리를 동이로 받아와서 쪽박을 띄워놓고 허연 배추속과 된장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마셔댔다.
하숙집 주인도 가끔 끼어들고 했는데 박정희는 평소에 말이 없다가 술만 한 잔 들어가면<왜놈들><왜놈들>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순신(李舜臣)이나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노래는<황성옛터>가 십팔번이고 방학 때도 집에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 줄은 전혀 몰랐다.
집안 이야기는 도통 꺼내지 않았다. 그는 늘 스파이크를 갖고 다니며 애지중지했고 아침 6시에는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어김없이 나팔을 불었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이 나팔소리가 들리면 문경사람들은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하고 일어날 정도였다.
그때 박 교사가 특별히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술만퍼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하숙집 아주머니는 박 교사한테는 꼼짝 못하고 생선을 사면 그에게 몸통을 주고 나한테는 꼬리만 준다고 내가 핀잔을 주기도 했다. 당시 문경군청 서기로 있던 이동년(李東寧)도 가끔 어울려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박 교사는 누구보다도 대일감정(對日感情)이 좋지 않았다. 말끝마다<왜놈들>이 튀어나왔으며 의식적으로 일본말을 회피하는 눈치가 역연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그 새끼 때려 죽이려다가 놔주었다.
왜놈이면 다여!"하면서 아리마(有馬)교장을 패주고 와서는 씩씩거리는 것을 보았다. 임창발(林昌發)은 박 교사보다 한 살 아래였다. 그러나 때로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도록 호되게 꾸짖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극히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친동기간이나 다름없이 허물없이 지냈다. 그래서 박 교사는 만주군관학교 시절에도 휴가 때는 문경하숙집에 들려 오래도록 묵어갔다.
그러므로 1969년에 옛 하숙집 아주머니였던 김순아가 죽었을 때 박대통령은 임창발에게 친필 위로편지를 다음과 같이 써 보냈다. 「30년 전 문경 재직시에 피몽(被蒙)한 갖가지 후의를 다시 추억하게 됩니다. 문경선(聞慶線)개통식에 참석하려다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 불참했는데, 모친께서도 오래간 만에 나를 만났으면 하고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편지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하는 사람이었다. 옛날의 은인을 잊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은혜를 베풀지는 않았고, 아무리 바쁜 중이라도 정중한 인사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것이다.

20세의 젊은교사 박정희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리하여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갓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월급45원을 받는 선생님이 되어 사회의 첫출발을 하게 되었으니 집안에서는 무엇보다도 가난을 좀 면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적지 않았고 구미 일대에서는<개천에서 용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교육은 인격을 완성해 가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는 ①튼튼한 몸 ②밝은 지식 ③아름다운 마음씨를 길러 줘야 한다는 것은 박정희가<교육학>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박정희 교사는 본래 운동하기를 좋아했다. 체조에는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체육시간에는 더욱 흥미 났다. 달리기, 철봉, 뜀틀, 멀리뛰기, 맨손체조 등을 위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씨름, 기마전, 축구 등 시합도 시키고 체육훈련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그가 학교에 부임하고 나서 몇 달 뒤부터는 가끔 아버지가 찾아왔다.
늙고 병든 아버지로서 첫째 자식이 보고 싶기도 했고 둘째 술좋아 하는분이므로 용돈이 궁하기도 하였으며 셋째 장가를 가고도 제 처를 돌보지 않는 자식을 타이르기 위해서였다. 박 교사는 그때 월급 45원을 받으면 하숙비8원, 가난한 집 아이들의 월사금으로 2~3원(1인당1원씩 2~3명)을 지출했다. 그리고 본인의 용돈으로 약10원을 쓰고 나머지는 상모리 집으로 송금을 했다.
그러므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온 데는 세 번째가 가장 큰 이유이다. 하기 싫다는 결혼을 억지로 시켜 놓았더니 제 식구를 데리고 가서 살림할 생각은 꿈에도 없는 것 같고, 하숙집에만 틀어박혀 집에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끔 아들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박정희는 아내가 더욱 싫어지기만하여 여름방학 때나 겨울방학 때도 아내가 있는 상모리 집에는 가지 않고 밖에서만 얼씬거렸다. 그러다가 교사로 부임한 지 1년 만인 193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당시 아버지의 병은 깊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따로 살림을 내어 오손도손 살기를 바랬지만 그 소망은 이룩되지 않았다. 한 번은 아버지로부터 송금(送金)은 필요 없으니 너의 처와 동거(同居)하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편지가 온 적도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박정희의 마음도 착잡하였으나 당시로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젊고 패기 만만했으며 반골정신이 농후했던 박정희 교사는 나날이 울분을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사범학교에서 배운 대로 은근히 민족혼을 일깨워주는 말을 자주했다.
"학생 여러분! 전세계를 얻는다 할지라도 민족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된다. 우리는 남을 이길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하면서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제자 이영태(李永泰)의 증언이다. 그는 사범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그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제자들의 증언

박정희 교사는 몸집이 작은 데다가 학창시절에 입던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교무실에서는 출입문에서 제일 가까운 말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은 가끔 사환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은 엄격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정열적으로 가르치는 박정희 교사를 좋아했다. 당시 제자들의 증언을 예로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정순옥(鄭順玉)의 말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때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박 선생님과 일본인 선생님 두 분과 함께 놀게 되었다. 그때 일본이 선생 한 분이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 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너희들 저 말 잘 새겨 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 당하는데 왜 그러세요"하고 반박한 기억이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다.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다.

전경숙(全慶淑)의 말 박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하숙을 옮겼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모친"이라고 불렀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주셨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였다.
5학년 20명과 2학년40명을 한교실에서 복식수업(複式授業)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 천정의 거미줄, 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완비하여 가지런히 정리 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한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고 "너희들도 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노래와 나팔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악대와 합창반도 조직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을운동회 때는 박 선생이 기마전, 기둥 넘기기, 공바구니 터뜨리기, 텀블링을 지도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소풍 때 문경새재를 갔을 적에는 제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이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선생님의 별명은<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박정희 교사는 사랑과 정열로써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 밑바닥에 항상 조선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민족적 울분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 자료등록일자 2004-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