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주의 세시봉 이야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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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1.08.16 03:09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4] 입장료 30원짜리 '우리들의 천국'
수필가 피천득 큰아들 피세영, 現 명동예술극장장 구자흥 등DJ들도 화려… 세시봉 인기 견인
1968년 당시 세시봉은 대학생들의 천국이었다. 입구에서 30원을 주고 입장권을 받으면, 문 앞에서 반을 떼고 나머지 반을 음료권으로 사용했다. 음료권으로 오렌지 주스, 계란 반숙, 우유, 일본 유산균 음료 칼피스, 홍차 등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으면 그것으로 세시봉을 즐길 준비 완료였다. 그날그날 프로그램이 달랐으니, 매일 와도 질리지 않았다. 주 손님이 대학생이어서 프로그램도 일찍 시작했다. 오후 5시부터 7시가 절정이었고 보통 오후 10시면 문을 닫았다.
세시봉 업주 이흥원씨의 권유로 나와 송창식·이익균 셋이서 '트리오 세시봉'을 결성한 이후엔 밤 10부터 세시봉은 우리들의 천국이었다. 팝송을 모르는 송창식에게 노래를 한참 가르쳐주고 나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있었다. 밤 11시 20분에 집으로 떠나는 막차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송창식과 함께 피아노 커버를 덮고 소파 위에 잠들었다.
당시 이름난 밴드들의 공연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세시봉은 다른 음악감상실과의 차별화를 위해 자주 라이브 무대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미 8군 무대에 섰던 밴드들을 적극 무대에 세웠다.
- ▲ 아마추어 가수로 보이는 한 여성이 마이크를 들고 세시봉 무대에 올랐다. 세시봉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대학생 문화공간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씨 제공
당시 미 8군 무대에 섰다는 건 어느 정도 실력이 입증됐음을 뜻했다. 미군 무대에 서기 위해선 어떤 밴드라도 3개월이나 6개월에 한 번씩 미국 국방성이 파견한 전문가들에게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 실력에 따라 'S.A(Special A)' 'AA' 'A' 'B' 'C' 'D' 등 등급을 매겼다. 'D'를 받으면 낙제요, 높은 등급을 받으면 전국 미군 클럽을 돌며 공연할 수 있는 자격을 줬다.
세시봉에서 인기 많았던 밴드 중 하나가 바로 미 8군 무대 출신 '웨스턴 주빌리(Western Jubilee)'라는 쇼 단체였다. 김동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이끄는 '웨스턴 주빌리'의 싱어 가운데는 가수 서수남씨도 있었다. 오렌지 밭 사이를 질주하는 열차를 묘사하는 연주곡 '오렌지 블러섬 스페셜(Orange Blossom Special)'이나 '가죽 장수의 블루스(Mule Skinner Blues)'를 부를 때면 모든 관객이 환호했다. 후에 '쾌지나 칭칭 나네'를 부른 김상국 역시 미 8군 무대 출신으로 세시봉 무대에 섰다. 그는 특히 미국 흑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 흉내를 잘 냈다. 그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부르며 관객들과 응창(應唱)할 때가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세시봉은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도 음악감상실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당연히 DJ의 역할이 컸다. DBS 동아방송의 '탑튠쇼' '세 시의 다이얼'을 진행했던 최동욱, 수필가 피천득의 큰 아들 피세영,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쇼쇼쇼'와 '브라보 선데이'을 연출한 조용호 등이 세시봉 초기의 인기를 몰았다. 내가 드나들 무렵엔 이흥원의 외아들이자 TBC와 KBS PD를 지냈던 이선권, 현재 명동예술극장 극장장인 구자흥 등이 돌아가며 DJ를 맡았다.
- ▲ 1953년 명동에서 문을 연 세시봉은 충무로1가와 소공동을 거쳐 서린동으로 옮겨와 전성기를 누렸다. 서린동 시절의 세시봉 입구와 간판.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씨 제공
프로그램이 진행될 땐 단연 이상벽이 돋보였다. 홍익대 출신이었던 그의 아이디어로 '삼행시 백일장'이 탄생했다. 시사만화 '두꺼비'를 그린 만화가 안의섭을 초대했을 때였다. 관객을 대상으로 '두꺼비'로 삼행시를 지어 보라고 했다. 아직 삼행시 짓기가 낯설 무렵이었다. '두두 두꺼비 꺼꺼 두꺼비 비비 두꺼비'가 장원을 탄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장원은 입장권 열 장 정도를 받았다.
삼행시 백일장이 큰 인기를 끌며 이상벽은 세시봉 MC로 자리 잡았다. MC(Master of Ceremony)란 직함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갖게 된 것도 그였다. 더 나아가 그는 후에 CBS '명랑백일장' MC로도 활동했다.
끝없을 것만 같던 세시봉의 전성(全盛)은 그러나 1969년 즈음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생맥주 홀이 명동을 중심으로 우후죽순 생겨나면서였다. '오비스 캐빈'을 비롯, '짝짜꿍' '오라오라' '쉘부르' '마이 하우스' '금수강산' '로즈 가든' '찬 살롱' '봉주르' 등 당시 개업한 생맥주 홀은 세시봉에서 활동했던 통기타 가수들을 무대에 세우기 시작했다. 세시봉 메인 MC였던 이상벽도 군(軍)에 입대했다. 자연히 관객들도 생맥주 홀로 몰리면서 세시봉의 명성은 점차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