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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와의 만남
바람처럼 구름처럼
2011. 2. 6. 15:07
육영수와의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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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 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에요. 얼굴보다 뒷 모습이 정직하거든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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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육영수의 만남을 중계한 것은 전란이었다. 충북 옥천부자 육종관이 솔가하여 부산으로 피란와서 영도에서 일본식 2층집에 세들 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8월하순이었다. 6.25 전쟁이 한창인 때 박정희의 대구사범 한 회 후배인 송재천이 찾아왔다. 그는 충북 옥천 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 교육을 받고 배속장교가 되었는 데 6·25가 터지자 소집영장이 날아왔다. 그는 선배인 박정희를 만나러 갔다. 박정희는 졸업하고 처음 보는 후배를 반갑게 맞아주면서 전투정 보과에서 포로신문관으로 일하도록 해주었다. 8월 어느 날 송 소위는 박정희에게 말을 건넨다. "과장님 왜 혼자 사십니까. 가족이 있어야 마음도 든든하고 위로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글쎄, 좋은 색시가 있어야지". 송 소위는 외가쪽으로 동생뻘 되는 육영수란 색시를 소개했다. 스 물여섯이라고 했다. "제가 보기에는 만점인데 과장님이 보시면 만점이 될지, 영점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그런 색시가 있느냐"하는 정도였다. 며칠 뒤 송 소 위는 다시 육영수 이야기를 꺼냈다. 박정희는 "그럼 한번 만나 보기나 할까"라고하는 것이었다. 송재천 소위는 그 길로 부산 영도에서 셋방을 얻어 피란생활을 하고 있던 이모 이경령을 찾아갔다. "이모님, 마땅한 자리가 있는데 영수 누이 출가안시키시겠어요?" "글쎄, 어떤 사람인데". "제가 모시는 상관입니다. 인품이 그만입니다" "성씨는?". "고령 박씨지요" "그렇게 좋은 사람인가". "청렴하고 강직하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분입니다". 박정희 소령은 송재천 소위의 안내를 받아 육영수의 집으로 찾아갔 다. 맞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박(박)소령은 육영수가 어딘가에서 자신 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르고 방문 앞에서 군화 끈을 풀고 있었다.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계시는 뒷모습이 말할 수 없이 든든했 습니다.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일 수 없는 법이에요. 얼굴보다 뒷 모습이 정직하거든요.". 영부인 시절 육영수가 한 말이다. 박정희는 육종관- 이경령 앞에 앉고 육영수는 찻잔을 나른 뒤 부모 옆에 단정히 앉았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고 있었다. 육종관과 박정희가 주로 이야기를 나누 었지만 수인사에 불과했다. 얼마 후 박정희가 자리를 떴다. 자기방으로 돌아온 언니에게 동생 예수가 물었다. "언니, 어때요?". 육영수는 달아오른 볼을 싸 안으며 생글거리기만 했다. 표정은 밝았 다. "언니, 웃는 것 보니 마음에 들었나 봐." "글쎄, 눈이 번쩍 번쩍 광채가 나는데 굉장히 무서웠어. 콧날이 날 카로워 성깔이 있어 뵈더구나. 그러나 주관이 확고하게 서 있는 듯한 그 눈에 마음이 끌려.". 이날 밤 송재천도 육영수에게 찾아가서 물었다고 한다. "사람은 체격도 작고 볼품이 없지만 마음이 아주 단단한 것 같고 돌 아서는 뒷모습이 아주 좋던데요.". 부끄럼을 타는 천성을 가진 박정희는 맞선을 보러 갈 때 떨리는 가 슴을 진정시키키 위해서 소주를 몇 잔 마시고 갔다고 한다(당시 전투정 보과 한무협 대위 증언). 송재천은 박정희 과장에게도 맞선 본 소감을 물었더니 싫다는 내색도 좋다는 표현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박정희 는 만만한사이인 김재춘 소령에게는 이런 말을 했다. "뭐, 키가 나보다 큰 것 같고, 뭐 보기는 봤는데 다시 만나봐야지.". 김재춘은 속으로 "이 양반이 까다로운 데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에 혼담이 오고가고 있을 때 전황은 벼랑으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는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던 날 중령으로 진급했다. 만 주군관학교 동기인 이한림은 당시 준장으로서 부군단장이었고 육사2기 동기생들은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동료들에 비해서 많은 나이와 낮 은 계급은 현실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을 구조화했다. 그가 해방 뒤 일 찍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쾌속승진가도를 달렸더라면 혁명 아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산 문현동 부근에 있던 육본은 9월22일 대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전날 박 중령은 영도의 양과자점에서 육영수를 만났다. 송재천 소위는 박정희와 동행했다가 먼저 나왔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약 혼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박 중령은 육본의 대구 이동 수송책임자가 되어 부산진역에서 체제의 편성을 지휘했다. 완전군장을 한 박정희 중령의 모습을 처음 본 송재천은 절도있고 명쾌한 지휘통솔에 감탄했 다. 한편으로는 저런 분이 북진대열에서 멀리 처져있다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육영수는 박정희가 이혼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 이경령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송재천이 이모뻘 되는 이경령에게 귀 띔을 했던 것이다. 이경령은 둘째딸의 사주를 들고 점을 보러 갔는데 "따님은 재혼하는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경령은 남편 육종관에게는 박정희의 혼력에 대해서 말하지 않 았다. 그러지 않아도 육종관은 박정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군인에게 영수를 시집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이경령은 한때 소실을 다섯 명이나 거느린 적이 있는 남편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이미 영수도 마음속으로 결정한 것 같으니 성사시켜줍시다.". 육종관은 항상 자신의 말을 잘 듣던 딸이 이 중대사에 있어서는 자 기 주장을 확실히 하는 데 오히려 당황했다. 한편으로는 섭섭하기가 이를데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구로 올라와 태평로에 하숙을 정했 다. 서울이 수복되면 육본도 서울로 돌아갈 것이었다. 이미 전방지휘 소를 서울에 설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박정희의 마음이 바빠졌다. 그는 송재천 소위에게 트럭을 한 대 주어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육종 관의 가족들을 옥천으로 태워보내는 길에 대구로 모시고 와서 약혼식 을 올리기로 했다. 이경령은 약혼식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다시 한번 남편을 설득하려 했다. 육종관은 "너네 마음대로 해!"라고 쏘아붙였다. 육종관 일가를 태운 트럭이 대구를 지날 때 이경령은 다른 이유를 댄 뒤 딸을 데리고 내렸다. 남편만 옥천으로 가게 했다. 소실을 다섯 명이나 데리고 들어와도 불평 한마디 못했던 이경령으로서는 남편 몰래 딸을 약혼식장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 일생일대의 결단이었을 것 이다. 모녀는 대구 동성로 네거리 자유백화점 옆 일식당 삼화식당으로 갔다. 그 시간 박정희는 전투정보과 사무실에서 이영근 중위에게 "나 하고 식사나 하러 갈까"라고 말을 건넨다. 다른 과원들은 점심 먹으러 나가고 없었다. 이영근은 영문도 모르고 지프에 올랐다. 식당 방에 들 어가니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가 할머니와 앉아 있었다"는 것 이다. 이 약혼식장에는 방첩부대장 한웅진 중령이 우인대표로 나왔다. 식사하는 걸로 약혼식은 끝났다. 모녀는 옥천으로 돌아가고 며칠 뒤 박정희는 육본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
< 자료등록일자 2003-05-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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