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북한군때삐라로만 봤던 태극기-동아일보 주성하 기자의 블로그에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2011. 6. 17. 08:48

카테고리 : 탈북자 수기

북한군때 삐라로만 봤던 태극기, 실제로 본 그 순간은 (13)

by 산소백심 2011/06/15 7:04 am

… … … … …

우리가 노자 한 푼 없어 화룡시의 아는 조선 족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주인은 주변에 사는 동서와 결탁하여 우리를 인질로 잡고 3년 전, 한국으로 먼저 간 용철의 누나에게서 중국 돈 오천 위안을 갈취하려 들었다. 주인집주인의 동서는 화룡 시 공안국(경찰서)의 모 간부 기사였다. 그들은 우리를 밖으로 나가게도 못하게 하고 용철의 누나와 전화통화도 마음대로 못하게 만들었다. 며칠 동안 억류된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러니 미리 짜놓은 계획에 순응하도록 우리와 용철의 누나에게 별도로 전화까지 유도하며 비열하게 놀았다.

어쩐지 점점 위험수위로 깊숙이 빠져가는 느낌이 강렬해졌다. 용철의 누나에게서 돈을 받지 못하면 무슨 불상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 같았다. 지들의 요구가 실현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신상을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으며 신병에는 평생을 후회 할 큰 손상까지 입힐 남음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나나 용철은 그래도 강철의 사나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북한군에서 단련된 제대군인들이며 그런 인간들에게까지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생각다 못해 그들의 강경함이 너무도 무지막지 하여 나와 용철은 그 곳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그의 집에는 19세 나이로 매일 허송세월을 보내는 여물지 못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종일 컴퓨터게임으로 시간을 보내고 사랑가만 즐겨 부르는 타락한 아들이었다. 또, 돈타령으로 어머니와 싸움만 하는 불효자이기도 했다. 그 녀석은 아버지, 어머니가 훈계하면 듣기 싫은 표정으로 항상 삐뚤게만 나갔다. 그래서 나와 성철은 그 아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 집에 인질로 감금된 지 5일째 되던 날, 주인이 장보려 잠깐 자리를 비우자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감시하는 아들을 보고 내가 1년 전, 받지 못한 인건비를 받으려 흥서 촌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인건비의 절반을 받으면 너에게 주겠다고 하는 나의 소리에 그 녀석은 손뼉까지 치며 어쩔 줄 모르더니 자기가 직접 발 벗고 나설 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암튼 좋았다. 우리의 속임수에 완전히 무너진 아들 녀석의 행동은 그야말로 기사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의 집에서 흥서 촌까지는 20여리가 되는 거리었다. 그를 데리고 화룡 기차역 근처에 접근하자 나는 화장실로 잠깐 갔다 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하여 다 쓰러져가는 길가의 전봇대 밑에서 주인집아들은 나타나지도 않을 우리에게 미련을 가지고 무한정 기다렸다. 그 시간에 나와 용철은 흥서 촌과 반대방향인 송화탄광 쪽으로 줄행랑을 놓는 시나리오에 성공하고 말았다.

우리가 걸음을 재촉하며 달린 것은 아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와 결탁한 무리들의 추격을 따돌리려 동쪽에 소리 내고 서쪽으로 향하기 위함에서였다. 그를 팽개치고 숨이 턱에 닿아 달리는 내내 나는 어쩐지 웃음이 절로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머리 큰 놈들이 동생 같은 녀석을 피해야만 하는 신세가 우스웠고 또, 몇 푼의 돈을 위해 속고 있는 등신 같은 아들 녀석이 쭈그리고 서있을 모습이 웃겨왔다. 그래도 왜서인지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한쪽으론 나보다 어린 나이의 주인집아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어차피 세상은 속고 속이고 또 속히는 것이 아닌가? 염치없이 돈을 옭아내려는 집주인의 파렴치함이나 어린 동생 같은 천진난만한 주인집아들을 속이는 나나 다 같은 나쁜 놈임은 분명한데 그래도 최소한 남에게 당하는 바보짓만은 피해야 할 것 아닌가?

천신만고 끝에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범의 굴 같은 곳에서 탈출한 우리는 탄광 근처에 있는 산골마을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다행히 그 곳에서 우리는 마음 고운 조선 족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은 넓으면서도 좁다더니 뜻밖에도 그 할아버지는 우리를 인질로 삼으려던 사람들을 너무도 잘 안다고 하였다.

혹시 자신의 집으로 들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와 용철은 그 날 밤, 할아버지의 집 부엌에서 날을 보냈다. 하여 판자 덮개를 덥고 그 사이로 어둠을 향해 비쳐 들어오는 실오리 같은 전등불빛에 두 눈만 부릅뜨고 바퀴벌레와 개미, 그리고 거미들과 꼼짝없이 운명을 같이 하는 두더지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좋았다. 두더지가 되어도 좋았고 그 보다 못한 바퀴벌레가 되어도 좋았으며 개미가 되고 또, 쓸모없이 부엌 안을 떠도는 먼지가 되어도 좋았다. 단지 잡히지 않는다는 담보가 보장된 느낌에 모든 것이 좋기만 하였다. 하지만 방심은 늘 금물이다. 하여 나와 용철은 서로 바라보며 기나긴 밤 시간동안 속수무책으로 콩알만 해진 간땡이를 쓸어내리기만 하였다. 그러다 날이 밝아오는 즉시, 바깥 땅 지하 속 김치저장고로 다시 몸을 바꾸어 숨기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자기의 아들을 시켜 화룡 시에 나가 벌어지는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보게 하였다. 할아버지의 아들이 와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날 밤, 우리를 놓친 작자들은 화룡 시 거리 구석구석마다 샅샅이 누비며 긴 밤, 먹잇감을 놓친 이리떼처럼 우리를 잡으려 핏 눈이 되어 날뛰었단다.

아들의 소리를 듣고 상황이 좋지 않음을 간파한 할아버지는 일 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농사로 뼈 빠지게 일하여 번 돈을 서슴없이 내 놓으며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택시를 불러 화룡기차역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주고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연길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주더니 우리를 쫒아 불편한 몸까지 이끌며 연길기차역에 따라왔다. 그 곳에서 다시 말을 모르는 우리를 도와 도문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어주었다.

토끼꼬리보다 못한 행복의 꼬랑지 한 부분이라도 잡기 위해 남을 천길 벼랑에도 서슴지 않고 떨어뜨리려 하던 주인집주인과는 대조적인 할아버지의 민족애와 깨끗한 양심에 왜서인지 나의 머리는 절로 수그러들고 감격이 북받쳐 올랐다. 이름 모를 할아버지의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적극적인 도움에 의해 우리는 그날 저녁, 특별히 별다른 저항도 없이 브로커가 있는 도문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행운을 안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용철의 누나가 보낸 조선족 브로커들과 함께 다음 날, 중국의 북경으로 가는 기차에 승차할 수가 있었다.

1박2일 동안 열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대륙의 열차행군으로 피곤은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잠은 잘 수가 없었다. 경찰들의 도사리는 눈을 피할 때마다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게나 겨우내 도착한 북경의 어느 한 곳에서 탈북여성 두 명과 합세한 우리는 한적한 장소에 몸을 맡기였다. 긴 여장을 풀며 그 곳에서 며칠 동안 있다가 다시 브로커의 부름으로 내가 하루 먼저 탈북여성 2명과 지정된 장소인 북경 주재 한국영사관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용철은 혼자 남아 다음 날, 움직이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들어 온 날은 메마른 한파가 때 이르게 들이닥친 날이었다. 찬바람은 먼지를 동반하며 북경 시내의 하늘가를 스산하게 덮어버렸다. 시야는 온통 뽀얗게 가려져 앞을 도무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햇빛마저 누렇게 되어 하늘과 사방 전체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능숙한 솜씨로 택시기사는 골목골목을 용케 빠져 나갔다.

오후 3시경, 택시기사가 브레이크를 밟자 조수석에 앉은 브로커는 오른손으로 옆을 가리켰다.

“보시오. 대한민국 영사관이요. 저기 현관문 앞에 보이는 것이 태극기요. 저 현관문만 뚫고 들어가면 대한민국 땅이란 말이요.”

뜻밖의 브로커의 소리에 그러지 않아도 떠날 때부터 두근거리던 심장과 경직에 가까워오던 나의 머리가 정신이 들며 번쩍 번개 불이 스쳐지나갔다.

“태극기라고?”

비록 뿌연 하늘가이지만 영롱한 태극기는 펄펄 휘날리며 나의 눈에 선명하게 안겨왔다. 삐라와 티브이, 비디오로만 보아오던 태극기의 생생한 모습이었다. 왜서인지 갑자기 나의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감격이 끓어 번지더니 가슴은 뭉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덧 새벽 계곡의 석간수처럼 손이 시릴 정도로 가슴은 시원해졌다. 그토록 갈망했던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 하얀 구름을 쓰듯 신비롭고 웅장한 태극기의 자태가 내 눈 속에 하나 가득히 들어왔다. 영상으로만 보아왔으나 이렇게 육안으로 직접 보긴 처음이었다.

큰 산은 가까이 보이지만 언제나 멀기만 하다더니 태극기의 품은 어서 오라고 마치 손짓하듯 했다. 벅차오르는 설렘을 억누르고 나는 두 눈을 부릅뜨며 휘날리는 깃발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북한군 사병 때에는 삐라로만 보아왔던 태극기였다. 헌데 그때보다 눈으로 본 실물은 더 웅장가고 뿌듯했다. 청색과 적색으로 이루어진 태극원은 흩날리며 접어드는 먼지투성이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자기의 참신한 우주만물의 상호작용에 의한 생성과 발전하는 자연의 진리를 더욱 부각시켜주었다.

‘저 깃발의 품속에서 실컷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고 마음 편히 자고 싶었던 내가 아닌가, 저 깃발의 품에 안기려 피 흘리고 땀을 뿌리며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길고 험한 터널에서 죽지 않고 뻗혀오지 않았던가?’

눈물이 핑 돌았다. 서서히 솟구치는 감정에 지나 온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북한군 감옥에서 한국에 가려고 탈출을 기도했던 주모자의 오명으로 9시간동안 교도소철문에 수갑을 차고 거꾸로 매달려 피 뿌리며 얻어맞던 생각, 병보석으로 출소되어 집으로 돌아가자 산송장 같은 내 몰골에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국으로의 길을 찾으려고 27차에 걸친 비법월경으로 이어가는 모험의 극치에서 순간순간마다 콩 알만해진 간을 다독이며 숨죽이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모습, 말을 몰라 중국인들에게 뼈 빠지게 일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천대만 받자 인륜을 어기는 살인까지 치려고 했던 미련한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또, 여기까지 오려고 수난을 불태우며 목숨이라도 건져보려고 발버둥 치던 중국 길림성 화룡변방대유치장과 청진집결소의 비참한 모습들이 영화화면처럼 또렷이 안겨왔다. 통한의 장면 장면마다 심장을 도려내는 듯 아픔이 느껴졌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15년 전 북한군사병으로 있을 때, 삐라를 통해 처음으로 접하였던 태극기와 “애국가”였다. 그때는 세뇌된 교육으로 하여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사회의 상징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아 무심결에 들여다보았던 태극기와 “애국가”가 언제인가부터 목숨을 버릴 만큼 나의 심장에 깊이 뿌리내릴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깃대의 기봉에 나부끼는 태극기엔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민족의 전통상징인 흰색바탕이 밝음과 순수함으로 제 모습 당당히 찬연한 빛까지 눈부시게 뿌려주며 높뛰는 심장을 더 한층 격동시켰다. 효의 조합을 통해 구체화한 4괘는 음과 양의 서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하늘과 땅, 물과 불로 상징하여 그 숭고한 깊이의 뜻은 오래도록 나의 가슴에 흥분으로 젖어들게 하였다.

지난날 가난하고 암매하여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되었던 우리 민족이, 그들의 의사와 기호에 따라 웃고 울던 한반도에서 힘이 없어 항상 불안하고 위험에 떨며 눈치만 보아왔던 약소국가의 설움을 안고 살던 우리 민족이, 내 눈앞에 휘날리는 저 태극기와 함께 모진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며 끝끝내 세계최고의 선진국대열에 들어섰다. 모든 악재의 선봉에는 언제나 저 태극기가 휘날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 뿌듯한 태극기의 장엄함이었다.

헌데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더더욱 기승을 부리며 주변의 나무들까지 심하게 움직였다. 그럴수록 한 점의 먼지로 하여 깨끗하고 정갈한 태극기가 조금이라도 더러워질 것만 같았다. 그러니 미웠다. 기승을 부리는 바람이 미웠고 그에 합세하는 먼지가 미웠다. 마치 그 놈들은 김정일과 그의 하수인들처럼 신성한 대한민국을 허물어보려는 야망으로 피를 물며 달려드는 거머리들 같이 보였다.

“정문과 현관문 사이는 7미터정도요. 반드시 유리로 된 현관문을 통과하여야만 한국으로 갈 수가 있소. 마당은 대한민국 땅이 아니요. 그러니 마당에 버티고 서있는 보안요원들에게 체포되면 모든 것이 끝장난단 말이요.”

브로커가 가리키는 쪽에 눈길을 돌렸다. 정문으로부터 불과 7미터 거리에 있는 현관 유리문, 수학적 계산으로만 셀 수 없는 만 10년의 세월동안 돌고, 돌고 또 돌던 그 장정의 거리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이 거리를 코앞에 두고 죽은 영령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 거리가 그렇게 오르기 힘들만큼 가파르고 높았단 말인가?

그랬다. 이 거리는 결코 평범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만 만 한 거리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함축해 말한다면 이 거리는 북한 김정일 독재정권의 인공기 밑에서 영원한 노예로 다시 남느냐, 아니면 자주적 삶의 주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태극기아래서 영원한 행복의 창조자가 되느냐 하는 심각하고도 첨예한 격전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거리를 통과하여 저 태극기가 휘날리는 정다운 품에 한번만이라도 안겨보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단두대에 서고 지옥의 기름가마에서 피를 흘렸던가?

나는 브로커의 말을 들으며 또, 순간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결심했다. 저 구간을 돌파하리라고, 무모하고 위험한 모험일지라도 무엇인가 새로운 힘으로 헤치고 싶었다.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탈북 여성 두 명을 한 팔에 하나씩 끼고 무작정 정문 철문으로 향하였다.

머릿속은 하얗게 되어버리더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쿵쿵거리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멎을 것만 같았다. 긴장은 위와 소장을 지나 배꼽부위의 대장까지 내려가며 짜릿한 느낌으로 느닷없이 따가움을 던져주었다.

이 걸음만 막히면 끝이라는 한 가지 생각에 하늘땅과 모든 것은 스톱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족보안경비 두 명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그들은 뭐라고 중국말로 다그쳐 물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우리를 보고 그들은 그렇게 상냥하던 눈빛을 부릅뜨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아니 저절로 가슴이 벌렁거렸다. 기대만큼 실망이 컸다.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는 대상도 되지 않는 자들이다. 능히 이길 수 있는 상대이다. 지금은 범법자로 칼날을 잡은 신세이지만 육체적, 정신적 힘으로 너희들을 물리치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저 품으로 얼른 뛰어가 안기리라. 그러면 다시는 너희들에게 멸시와 공멸을 받는 민족이 아니라 잘사는 나라, 부강한 나라, 문명한 나라의 국민으로 존경과 부러움을 받게 될 것이다.’

생각할수록 끓어오르는 흥분으로 하여 더욱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몹시 난처한 위치에서 이상야릇한 보안 경비들의 괴성에 질려버릴 정도였다. 태풍의 눈처럼, 보안 경비들의 눈에서는 태양처럼 이글거림이 보였다. 조금 전 모습과는 영 딴 판이었다.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에서 살기마저 일었다.

나는 격동된 전신의 힘과 어릴 적 어머니의 젖 먹던 힘까지 총 동원하여 두 명의 보안 경비들을 밀어버리고 정신없이 내달렸다.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한족 보안요원들은 어리둥절해지더니 중심을 잃고 넘어졌던 몸들을 추스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문제는 그들이 일어서 달려드는 순간, 벌써 나와 두 여성들의 몸은 유리문을 통과했던 것이었다.

나는 현관유리문을 박차고 들어와 끝내 기겁한 가슴을 추스르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두 명의 여성들을 잡았던 팔은 놓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순간, 나도 모르게 소스라쳐 놀랐다. 어데서 그런 초인간적인 힘이 폭발했는지 내 자신이 의문스러웠다.

생각 외로 영사관 안은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 환경과 마음의 무게에 실려 무정하던 밖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그러니 좀 전에 벌어졌던 상황은 더 실감나지 않았다.

나는 쥐죽은 듯 반질반질한 콘크리트 바닥에 발을 얹고 꼼짝하지 않으려했다. 그러면서도 유심히 전방을 살폈다. 이때 한 사내가 다가왔다. 다시 한 번 나의 간담은 사늘해졌다.

‘중국인일까? 아님 정말 대한민국 땅이 맞을까?’

머릿속은 갖가지 생각으로 다시 쿵쿵 방아를 찧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분명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심장한 어조였는데 억양은 아니다. 지금껏 30년 동안 귀청이 찢어질 듯 들어오던 그런 억양이 아니었다. 함북도도, 함남도도 그리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억양도 아니다. 언제인가 중국친척집에서 비디오로 보았던 대한민국 드라마 연기자들의 억양이었다. 거친 숨으로 헐떡이는 우리 앞에 나타난 사내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 영사관직원인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헷갈렸다. 그의 말이 긴가민가해졌다. 오나가나 매양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내가 짚고 있는 땅이 3분전만 하여도 머릿속을 숙명으로 받아 들일만큼 흥분과 격동으로 만들었던 그 땅이란 말인가? 나도 모르게 독백이 커졌다. 이것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위해 나는 나의 오른 손 검지를 깨물어 보았다. 아팠다. 분명한 것은 현실이었다.

문득 옆에 있는 두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그들도 창백했던 얼굴들을 방치한 채, 믿기지 않는 듯 머리만 기웃거렸다. 그러면서도 눈물이 맺힌 눈가에 연신 손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들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이 생각나고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또, 오늘도 속수무책으로 아무렇게나 나돌고 있을지 모르는 바보 같은 남편 생각에 근심만 할 아내가 안타깝게 그려졌다.

나는 끝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직원의 물음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막무가내였다. 사실, 혼자서 실컷 어리광이라도 부리고만 싶었던 것이다. 미친 듯이 화장실로 띄어간 나는 변기에 얼굴을 파묻고 정신없이 울었다. 어쩐지 지금껏 참아오고 그려보던 슬픔과 기쁨의 한계를 너무도 뜻밖에 목격하자니 모든 고통과 울분, 치욕과 진실의 결정체와 꿈만 같았던 숙원을 땅속에서 생성되는 수정 같은 맑은 물로 깨끗이 씻어 버리면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왜서인지 그 와중에도 아내의 얼굴이 제일 그리워졌다.

‘여보, 당신에게 커피 한잔을 여유롭게 먹여 주리라던 약속이 이제야 지킬 것만 같소. 혼자 와서 정말 미안하오.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꼭,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야 말 것이오.’

한동안 정신없이 울고 나니 마음은 개운해졌다. 수돗물을 켜놓고 벌컥, 벌컥 주변이 시끌벅적하게 요동치듯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차디찬 수돗물에 잠겨버렸다. 그래도 선뜻 정신은 맑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다 할 진전이 없던 내가 자기 정상으로 돌아온 것은 대기실에 앉아 대한민국 정규채널을 티브이로 15분 동안 보던 시점이었다.

불쑥 나의 머리를 강타하는 외침이 심장으로 들려왔다. 그 외침을 나는 뼈에 새기고 싶었다. 어머니의 젖 줄기와 같은 소중한 이 땅, 내가 현재 밟았고 편안한 소파에 앉아있는 이 땅을 다시는 영원히 빼앗기지도 잃지도 않으리라. 그리고 이 땅을 끝까지 지켜 독재자들에게 치욕의 역사를 두 번 다시 강요당하지 않으리라. 또, 우리의 후손들에게 휘황찬란한 태극기와 대한민국의 역사를 나와 같이 뼈와 심장에 새기게 하리라.

더 이상 나의 심장 속에는 흉물스러운 김 부자의 얼굴처럼 가련하고 짝이 없는 북한의 인공기란 없다. 오늘도 그렇지만 내일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후손들의 심장 속에는 수정보다 맑고 깨끗한 희망이고 미래인 태극기만이 붉게 휘날릴 것이다. 설사 번개처럼, 번개처럼 왔다가 간다 한들 그대에게만은 아름다운 삶을 보탤 것이며 또한 순간을 살지언정한 점의 빛이라도 남겨 그대에게 더해가리라 사랑의 빛을!1!

날은 저물어갔다. 기승을 부리던 바람도 잠잠해지더니 고개를 숙이고 마치 우리의 진입을 축복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허나 기온 하강에 따른 한파가 대기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새벽시간으로 접어들자 창문들에는 하얀 성에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날은 2003년11월23일이었다.

카테고리 : 탈북자 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