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구름처럼 2011. 12. 16. 12:24

길을 가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휴대전화에 문자를 보내 놓았었다.

11월 27일 오후 4시 18분

개는 인간보더 더 냄새를 잘 맡는데도 왜 구린 냄새를 못 느끼고

똥도 먹는 걸까? 인식의 차이인가?

냄새를 너무 잘 맡아서, 지구의 자전 공전속도에서 나는 굉음을

못 듣듯이 너무나 센 냄새라서 정도를 넘어 섰기 때문에

못 느끼나?

아니면 단순히 뇌의 구조차이인가?

생물의 반응은 모두가 생존에 연관이 있는데

인간의 똥 냄새에 대한 반응은 뭘까? 아~ 일단 질식의 문제다.

개는 질식을 해서 죽어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잘 견디나?

똑같이 산소를 필요로 할텐데......

만약 동물은 인간보다 질식해서 죽을 확률이 낮다면 수긍이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뇌손상이 인간과 개가 다르다면 그 또한 설명이 되는 차이이고.

애완동물이라는 말 대신에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쓴다.

자연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일텐데

참으로 재미있다.

들개로 남아서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면 끝까지 우리의 적이고 경쟁자였겠지만

인간이 강해 지니까 우리가 그들을 이제서야 포용을 하고자 한다.

일본보다 힘이 약할 때는 끝없이 얍잡아 보이게 되고 동포들의 대우도 나쁘고

국제사회에서도 늘 일본에 밀리는데 국력이 강해지니 문화도 대우받고 또 좋은 수준의

것이 제작되었던 것이고, 문화 과학 경제의 전반이 동반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보라. 너무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신봉하지 말라.

자연스럽다는 것은 인간 중의 수컷이 물리적으로 힘이 약한 암컷에게

강간을 통하여 자기의 씨앗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수컷의 힘이 암컷보다 강한 이유는 종족 보전의 숭고한 자연적 본능적 진화으 결정체이다.

그러나 이건 사회적으로 우리가 약속한 것들과 어긋나는 것이다.

함부로 애완동물이 틀린 말이고 반려동물이 맞다거나 하는 얕은 말들을 내뱉지 말 일이다.

11월 27일 오후 3시 40분

처음으로 먼저 인사하는 경비경찰

서울성곽 백악산구간을 오르면 경비병들인지 경찰들인지

모두가 말이 없고 먼저 인사를 하는 법이 없다. 아마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이 날은 유독 숙정문에선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는데 미리 인사를 해와서 반가웠다.

처음이었다.

11월 26일 오후 6시 36분

지게작대기로 맞아가며 큰 아이들은 트라우마가 없다.

비교감정 도시 성장아이들

인간은 물과 같아서 형태가 없다.

온실 속의 화초같이 너무 많이 보호받고 자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한 것 같다.

신체적으로 약해지면 면역력이 약해서 병에 잘 걸리듯이 정신적으로 나약하면

정신적 병에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육체적으로 게으른 생활을 하며 살 뺀다고 돈 들여서 운동을 하는

도시 부유층과 농사일에 살 찔 틈이 없는 시골 어른들을 비교하여 보게 되듯이

우리는 우리 스스로 혹은 우리의 자녀들을 너무 귀하게 키우다 보니 끝까지 안심을 하지

못하며 계속해서 키우고 보호하고자 한다.

이게 바로 신체적인 연약함을 초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사랑하는 자기의 몸이나 자식들의 정신건강은 강하게 키울 일이다.

물론 이런 과격한 행태는 당연히 자식 잘 되기를 바란다는 마음 속 바탕이 있거나

혹은 시골처럼 각 가정마다 비슷하게 커오게 되면 특별히 나만 그렇다는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되어서 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조련한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그냥 편하게 쓰기로 하고,

사람은 애초부터 만들어진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과 같아서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르다는 것은 때로 스스로가 아니라 남이 볼 때에 다르다는 것일 때가 많아

평가의 의미, 보여지는 의미이지 냉철한 내면의 자아는 아닐 수도 있다.

11월 8일 오후 10시 18분

뜨거운 용광로에 눈이 갈 때 용광로는

스스로는 견디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으로 바보여서 정말로 귀중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화려한 연예인들의 주변에는 그들을 꾸며주는 많은 방송제작진들이 있음도 같은 경우다.

쇠를 만들어내는 용광로 안의 쇳물을 보며 탄성하고 저 뜨거운 것을 견디며

스스로 멋진 용도에 맞는 쇠가 되어가는 모습에 감탄하고 찬사를 보낼지 모른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저 용광로야 말로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뜨거움에도 형태가 변하지

않으며 쇳물을 포용하는 커다람이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인간이 불타는 쇳물에 찬사 보낼 때 눈 밝은 이는 용광로에 감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