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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총리 부부

바람처럼 구름처럼 2011. 2. 15. 11:42
사회
사람들

[오늘의 세상] "60년 동안 나는, 멍텅구리 사랑을 했소"

JP 부부 결혼 60년… 그 세대의 사랑과 전쟁

김종필(金鍾泌·85) 전 국무총리 부부가 15일 결혼 60년을 맞았다. 김 전 총리와 세 살 아래인 박영옥(朴榮玉·82) 여사는 1951년 1·4후퇴의 그 참담한 전선(戰線)에서 결혼했다. 결혼 60년이면 회혼(回婚)이다. 지금 회혼을 맞는 부부들 모두가 전쟁통에 인연을 맺은 것이지만, 1·4후퇴 60년인 이 시기에 듣는 김 전 총리 부부의 이야기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전쟁발발과 첫 만남

박 여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형의 딸이다. 김 전 총리가 첫 만남을 회고했다. "당시 박정희 소령(실제로는 문관)이 국수를 좋아했어요. 우리 젊은 장교들을 불러서 국수를 만들어줬어. 1950년 6·25전쟁 직전 어느 날도 박 소령 관사에서 국수를 먹는데, 못 보던 여자가 왔다갔다해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박 소령이) '저거 내 조카딸인데 국민학교 선생하고 있지' 하시데. 부끄러우니까 부엌으로만 가고 장교들 앉은 쪽으로는 안 와. 그때 처음 봤지요."

전쟁이 터졌다. 국군은 허무하게 무너져 낙동강 전선에 마지막 보루를 만들고 있었다. 대구역에 적의 120mm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국군은 대구의 한 여관을 정보국 장교 숙소로 사용했다. 어느 날 당시 중위였던 김 전 총리를 한 여자가 찾아왔다. "'김 중위'가 누구냐고 묻기에 나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박 소령(50년 6월 28일 소령으로 공식복귀)이 '조카딸인 박영옥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김 중위를 찾으라'고 했다는 거예요"

따라가 보니 요도 없이 홑이불 한 장을 쓴 박 여사의 몸이 고열로 끓고 있었다. 말라리아였다. "박종규 일등중사(후에 경호실장)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의사 구해오라고 했지. 의사가 약을 먹이니 효과가 있었어."

첫딸 예리를 얻고 아내 박영옥 여사와 1952년에 찍은 가족사진. 그로부터 9년 뒤인 1961년 아들 진이 태어났다. 5·16혁명이 성공한 뒤다.
얼마 후 박 여사가 친구들을 데리고 김 중위를 찾아왔다. 김 중위는 그들에게 비스킷, 빵 등이 들어 있는 미국 야전식을 대접했다. 박 여사는 며칠 걸러 한 번씩 찾아왔고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당시 느낌이 어땠냐"는 물음에 김 전 총리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쏠리더군."

어느 날 박정희 중령(소령에서 진급)이 연병장으로 김 중위를 불러냈다. "내 조카딸 어때?" 단도직입이었다. "좋게 봤습니다" 하니 "그래? 빠르긴 빠르구나"는 답이 돌아왔다. 박 중령은 "잘생기진 못했지만 기질은 좋은 여인이다. 데리고 갈 생각 없나?" 하고 몰아붙였다. 김 중위는 그때 결혼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지내봐야지요" 했더니, 박 중령은 "지내보긴 뭘 지내보나. 이 전쟁 언제 끝날지 모르지 않나"라고 했다.

1·4후퇴와 결혼

9월 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전면 반격을 개시했다. 6사단이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을 때 김 중위는 평양 너머 청천강까지 가 있었다. 그러다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급습을 받았다. 전(全) 전선이 붕괴되면서 처절한 후퇴가 시작됐다. 겨우 서울 육군본부로 돌아온 김 중위는 건물 앞에 서 있는 박 여사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여사는 대구에 있어야 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중위님 연락이 끊어져서 죽은 줄 알았어예. 여기 와서 확인하려고 왔어예." "뭘 타고 왔소?" "화물차 얻어타고 왔지예." 김 전 총리는 그때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언제 죽을지 몰랐어요. 그러면 둘 다 외로운 고혼(孤魂)이 되는 것이지. 시간이 없다고 느꼈어."

다시 서울이 중공군 손에 떨어졌다. 나라가 존망의 기로에 선 그때 두 사람은 대구의 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자는 아니었으나 신(神)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나는 전투복에 군화 신고, 아내는 평생 한이 될까 봐 대구를 다 뒤져 신부 복장을 찾아서 입혔지."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중령의 황소 선물을 회고했다. 박 중령은 강원도에서 싸우느라 못 왔다. 대신 황소 한 마리를 보냈다.

춘천의 폐허에서

결혼 두 달 뒤 대위로 진급한 김 전 총리는 육군사관학교에서 본부 중대장을 하다 그해 8월 6사단에 자원해 다시 전선으로 갔다. 가족은 두고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 대령 (중령에서 진급)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네 집사람을 춘천 시장통에서 만났네." 육군본부에 있던 박 대령이 춘천으로 출장을 왔다가 폐허가 된 춘천에서 우연히 박 여사를 발견한 것이다. 박 여사는 젖먹이 첫딸 예리를 업은 채였다. 김 대위는 연대장의 지프를 얻어타고 춘천으로 달렸다. "가 봤더니 다 부서진 집에 거적을 덮고 담요로 바람구멍을 막은 곳에 젖먹이와 함께 있어. 영하 20도가 넘는 극한의 날씨였지.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걱정이 돼서, 그 추운 데서 어찌 사나 싶어서 왔다는 거요." 김 전 총리는 "집사람의 그 열정 때문에 내가 60년을 꼼짝 못하고 살아온 거지"라면서 껄껄 웃었다.

"여자 문제로 다투지는 않았다"

김 전 총리는 60년 결혼생활의 공을 모두 아내에게 돌렸다. "부침이 심했던 내 인생 아니오. 쫓겨서 해외에 나간다고 하면 나보다 더 속 썩고 짐 지는 게 집사람이었지. 내가 어디 가서 사고가 나진 않나, 어디서 굴러다니는 건가, 매일 소식 줄 수 없으니 내 연락만 기다리며 좌불안석하느라 허송세월한 여인이지. 참 고마운 여인이야."

김 전 총리는 "부부싸움은 안 하셨는가"라고 묻자 잠시 침묵한 뒤 "내가 여자 갖고는 다투지 않았어, 그거 하나는 큰소리칠 수 있지" 하고 '비장하게' 답했다. "내가 지난해 농담으로 '어이, 59년 한 여인과 잔 멍텅구리 놈이 여기 있어' 했다가 집사람한테 엄청 혼났어요. '당신만 한 여자랑 잤느냐'면서 말이지."

말미에 김 전 총리에게 "우리 인생에서 결혼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결혼이 뭐냐고? 고생길을 택하는 거지. 젊은 사람들이 결혼의 참뜻을 몰라요. 섹스나 하는 걸로 알고, 기분 나면 좋다고 하고, 기분 나쁘면 헤어지고. 내가 못할 짓 많이 했지만, 다른 거 몰라도 60년 한 여인과 살아온 그 마음은 젊은이들이 따라줬으면 좋겠어." 회혼식은 가족들만 모여 서울의 한 식당에서 조촐하게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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