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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일보에서]탈북자의 대모 수잔 숄티 디펜스포럼 대표

바람처럼 구름처럼 2011. 5. 2. 03:19
사회
종합

[최보식이 만난 사람] '탈북자의 代母' 수잔 숄티 디펜스포럼 대표

입력 : 2011.05.01 23:05

"김정일은 히틀러보다 악랄… 독재정권과 타협은 상황 개선 못해"
내가 아는 한국말 딱 3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주먹을 쥔 채 "자유북한!"
'북한인권법' 계류 중 한국이라는 나라의 수치 법적 의무까지 방기한 것

수잔 숄티(52) 디펜스포럼 대표는 '탈북자의 어머니'로 불리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런 '어머니'는 아니었다. 체격은 철벽처럼 당당했다. 고개를 약간 쳐들었을 때의 표정은 강인했다.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어떤 견해와 압력에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보였다.

"김정일은 히틀러나 스탈린보다 더 악랄하다. 정치범수용소만 봐도 나치나 소련정권보다 더 오래되지 않았나. 적어도 나치 독일에선 여행의 자유라도 있었다. 세계인권선언 조항 30개 중 단 한 개도 충족 못 하는 나라는 지구상 북한뿐이다."

―김정일이 직접 이 말을 듣는다면 당신을 어떻게 할까?

수잔 숄티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밤 호텔 숙소에서 만났다. 그녀는 '북한자유주간' 행사에 맞춰 방한했다. 이 행사는 그녀가 2004년 워싱턴 미(美) 의회 건물 앞에서 '북한인권법' 제정을 위해 '1일 시위'를 한 게 계기가 됐다. 이듬해부터 '1주일 행사'로 늘어났고, 작년부터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인데…내가 서울에 처음 온 것은 1999년이다. 그때는 한국 정부가 내가 하는 일을 존중했다. 전혀 알리지 않고 왔는데 정부관계자가 공항에 마중나왔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 시절 전국 순회강연을 할 때 늘 차가 내 뒤를 따라다녔다. 뭐, 보호해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 요즘에는 다시 상황이 좋아졌다."

수잔 숄티는 미국 정계에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를 환기시킨 인물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 등 탈북자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미국에 초청한 이도 그녀였고, 몇몇 북한인권단체에 후원금을 마련해준 이도 그녀였다. 2004년 미 의회가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킬 때도 그녀의 노력이 있었다.

―막상 한국에서는 야당의 반대로 '북한인권법'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국가적 수치다. 노예로 살고 있는 2300만명 북한 주민들의 생사가 걸린 문제에 한국 정당들이 뜻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미국은 2004년 만장일치로, 일본도 2006년 이 법을 통과시켰다."

―반대 논리는 북한을 자극할 뿐 남북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여당이 발의한 2008년판 법안 영문판을 가방에서 꺼내보이며) 한번 읽어보라. 무엇이 북한을 자극한다는 건가. 김정일을 암살하자는 게 아니다. 인권이라는 기본 가치를 지키자는 내용뿐이다. 북한을 탈출한 형제자매들에 의해 인권 유린 상황은 낱낱이 밝혀져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북한 주민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했다. '도덕적' 의무만 아니라 '법적' 의무도 있다는 뜻이다. 이를 외면하는 좌파들은 역사적 심판을 받을 것이다."

―북한 정권에 인권 문제를 제기하면, 핵(核)협상을 어렵게 하고 한반도 긴장만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독재정권의 비위를 맞출수록 갈등과 전쟁 위험이 더 높아졌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과거 클린턴 정부는 북을 달래며 비핵화 협상에만 매달려 인권 문제를 제쳐뒀다. DJ의 '햇볕정책'도 듣기에는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 10년의 결과가 어떠했나. 북한은 선의를 악용해왔다. 4자든 6자 회담이든 다 실패했다. 북한을 달래려고 인권 문제를 덮어둔 세월 동안 북한 주민 300만명이 굶어죽었다."

―북한 주민에게 가장 급한 인권은 '먹는 문제' 아닐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햇볕정책'으로 식량과 생필품을 지원하는 것은 당신의 '인도주의'에도 맞지 않는가?

"우리는 '전달'의 관점에서만 본다. 실제로는 '소비'의 관점이 중요하다. 북한 주민들이 직접 받아 쓰는지 '모니터링(감시)'이 이뤄져야 한다. 북한 정권은 식량을 지원받아 지출을 줄일 수 있게 되자 남는 돈을 핵 개발에 썼다. 이건 '팩트'다. 탈북자들의 미 의회 증언이 문서로 남아있다. 한 탈북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외국구호단체의 트럭이 오면 주민들은 식량을 받고서 사인을 한다. 하지만 그 트럭이 떠나면 군대가 와서 몽땅 도로 거둬간다. 바깥에서는 인도적 지원을 했으나 정작 주민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됐다는 것이다."

―탈북자의 증언을 그대로 다 믿나?

"좀 윤색되고 과장된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의회 증언은 법적 선서를 한 뒤 이뤄지는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남한이 즉시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한숨을 쉬며) 지미 카터가 누구냐. 미국 역사상 최악의 실패한 대통령이다. 그는 소련에 타협해 냉전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북한을 안 도와줘서 주민들이 굶고 있다는 식의 발언은 정말 무식한 발언이다."

―북에 지원된 식량이 설령 '군량미'로 전용된다 하더라도, 일부는 주민들에게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외국구호단체가 식량을 나눠줄 때 말이 통하는 한국인이 동행해야 한다. 북한은 그것도 막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직접 먹는 것을 확인할 수 없는 한, 인도적 식량 지원은 반대인가?

"그렇다. 투명성이 보장 안 되는 식량 지원은 독재 정권만 먹여 살릴 뿐이다."

―그렇게 원칙적 투명성만 주장하는 것은, 당장 굶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돕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그건 내가 이미 대답했지 않느냐."

수잔 숄티는“대북 인도적 지원은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독재정권만 연장시켰다”고 말했다./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 대목에서 그녀의 표현으로는 '터프하게' 부딪쳤다. 그녀는 "왜 같은 질문을 계속 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나는 또 "북한 정권의 태도가 안 바뀌면 주민들은 계속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가?" 물었다. 공교롭게 인터뷰 다음날 세계식량계획(WFP)이 "북한에 긴급 식량지원(2억달러)을 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나 민간단체의 대규모 식량 지원이 북한 주민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어떻게 도울 것인가?

"과거 서독은 동독 주민들을 돕기 위해 시장에 직접 자금을 투입했다. 또 비행기로 민간인 거주지에 식량을 떨어뜨렸다. 우리도 새롭고 창조적인 북한 지원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폐쇄적인 북한 상황을 구(舊)동독과 그대로 비교할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북한에는 200여개의 장마당이 활성화됐다. 북한 체제를 유지해온 배급체계가 와해되고 있다. 주민들의 정권 의존도가 줄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은 시장 통제를 위해 화폐개혁을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현재 남한 내 탈북자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비밀송금을 하고 있다. 이 돈으로 장마당이 돌아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 이런 장마당이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또 대북 풍선에 달러와 식량, 라디오를 매달아 날리는 것도 직접적인 지원이 될 것이다."

―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북한과의 대화는 막혔다. 대북 지원도 중단됐다. 이게 바른 길인가?

"역사는 독재 정권과의 타협이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함을 말해준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안 해서는 곤란하다. 인권 탄압자들은 나중에라도 법정에 세울 것이라고 공언하라. 그건 경고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식량 지원 방법으로 주민들을 직접 돕는 길도 찾아야 한다. 지금 북한에는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이때 남한이 손 놓고 있으면 정권 연장을 돕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붕괴해야 한다고 보나?

"(낯빛이 밝아지며) 당신도 같은 생각인가? 지금 북한은 김정일이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취약한 시기다. 이런 타이밍을 잘 살펴야 한다. 다만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싸울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그래서 나는 군부내 반대세력이 움직여야 변화가 있다고 본다."

―김정일 이후에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인권 상황은 나아질까?

"아들 김정은이 집권하면 아마 더 악화될 것이다. 순서를 어겨 세 아들 중 막내를 지목했다. 김정일이 직접 지목한 후계자라면 얼마나 잔인하겠는가. 김씨 부자가 제거되고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분명히 상황은 나아질 것이다."

―김씨 세습정권 타도를 위해 좋은 방법은?

"지금껏 말했듯이 대북 풍선을 계속 날리고, 장마당에 현금을 투입해야 한다. 단파라디오 방송 시간대를 더 늘려야 한다. 남한의 하이테크 능력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 휴대폰도 보내라. 폐쇄사회라 하더라도 이제 정보 제공이 얼마나 쉬워졌나. 주민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면 아마 무시 못할 힘이 될 것이다."

그녀는 고교시절 레이건 후보 선거캠프에서 일했다. 대학 졸업 후 의원보좌관을 지냈다. 결혼 후 1983년 미국 안보와 세계인권 문제를 다루는 '디펜스포럼 재단'을 설립했다. 구(舊)소련과 쿠바, 중국의 인권탄압 사례를 미국에 소개하다가, '탈북자'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6년이었다.

"정치범수용소에서 탈출한 한 여인을 만났다. 강제노동을 하면서 갓난아기를 키웠다고 했다. 아이에게 먹일 젖이 부족해 단백질 보충을 위해 메뚜기를 잡아먹으며 견뎠다. 하지만 탈출하기 전 아이는 결국 굶어죽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만난 다른 여성탈북자에게서 딸을 두고온 사연을 들었다. 대신 그 딸을 구해오기 위해 그녀는 다시 북한에 들어갔다. 그때 붙잡혀 온몸이 마비될 정도로 맞았다. 현재 그녀는 부산에 정착해있다. 그런 고통을 겪은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을 돕는 걸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 나는 지금의 일에 어떤 소명을 느꼈다. '사랑의 노동(labor of love)'이라고 할까. 보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북한인권운동을 한 지 15년이 흘렀다. 무엇이 달라졌나?

"내 신념이나 열정은 달라진 것 없다. 물론 좌절을 느낀 적은 있었다. 2008년쯤인가, 이렇게 해왔는데 북한이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사회도 냉담했다. 대학생을 상대로 한 특강에서 '과거 대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이제 여러분들은 북한 민주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작년부터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2008년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당시 상금 20만달러를 탈북자 구출프로그램에 기부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 상금 중 48%는 미국에서 세금으로 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국무부와 관련된 민간 컨설팅회사에서 일한다. 세 아들이 있다. 이번 방한으로 부활절 휴일을 가족과 함께 못 지냈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밤 10시쯤 끝났고, 우리는 모두 식전(食前)이었다.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한국말도 좀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려는데 시간이 없었다. 딱 3개 할 수 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먹을 쥐며 말했다. "자유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