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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밝히는 사실-5 신동아에서

[5·16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40년 만에 털어놓은 군사쿠데타의 숨겨진 진상 5]

장면은 장도영의 이중플레이에 속았다

“김일성 만세!”

 

결국 자동 대상은 666명, 그리고 심사 대상은 1만4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사람들이 공권력 제한 대상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나라 전체가 큰 충격 속으로 휘말려 들었다. 소급법이 범죄에 대한 철저한 단죄라는 측면도 있었으나 정치적 보복이라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다. 약체 내각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역풍을 맞게 됐다. 공민권을 제한하는 헌법의 개정 파동은 혼란상태에 빠진 사회를 더 한층 혼란스럽게 몰아갔다.

 

사회 전체가 좌경화 물결을 타는 듯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데모가 일상화되자 장면정권은 마침내 ‘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을 마련해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불붙은 데 기름을 퍼붓는 꼴이었다. 쿠데타가 발생하기 약 두 달 전인 3월22일 ‘횃불 데모’라는 기상천외한 과격 데모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시위대는 밤늦게까지 ‘남북회담’ ‘김일성 만세’ ‘장내각 퇴진’을 구호로 외치면서 명륜동 장면 총리 집 근처에서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청와대 비서실은 시시각각으로 데모 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저녁 9시경 대통령은 비서실장 전용인 지프를 대기하라고 했다. 대통령은 극비리에 지프를 타고 명륜동 데모 현장으로 가자고 했다. 비서실장도 나도 신변 안전을 위해 반대의견을 진언했다. 대통령은 우리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와 김남 비서관에게 수행하라고 했다. 단 한대의 경호차도 없이 중앙청과 안국동 한국일보를 지나 명륜동 장면 총리 집 근처에서 차를 멈추게 했다.

 

횃불 데모는 사실상 데모가 아니라 일종의 광란이었다. 데모를 구경하는 시민도 데모를 말리는 경찰관도 눈에 띄지 않았다. ‘미군 철수’ ‘김일성 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치면서 간간이 ‘2대 악법 철폐’를 외치는 데모대 광경은 여기가 서울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대통령은 끝까지 지프 속에서 눈앞에 벌어지는 광란의 현장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대통령의 지시도 받지 않고 운전사 보고 그만 가자고 다그쳤다. 만일 현장에서 대통령임이 발각되면 살아남을 것 같지 않은 공포감마저 느꼈다. 청와대로 돌아온 대통령의 표정은 전에 보지 못할 만큼 굳어 있었다.

 

“내일 아침 장총리와 민·참 양원의장, 그리고 각당 대표를 청와대로 부르도록 하게.”

 

우유부단한 지도자들

 

대통령은 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횃불 데모가 있고 다음날인 23일 밤, 청와대에서는 윤대통령과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의장, 백낙준 참의원의장, 현석호 국방부장관, 야당인 신민당에서 김도연 위원장, 유진산 간사장, 양일동 총무, 조한백 총무부장 등 명실공히 ‘국가최고지도자회의’가 개최됐다. 조재천 법무부 장관만이 긴급 용무 때문에 불참했다.

 

회의는 처음부터 긴장된 분위기였다.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듯한 비장감이 흘렀다. 대통령은 전날 밤 자신이 직접 목격한 횃불 데모 현장을 상세히 설명하고 사태를 조속히 수습할 것을 강조했다. 장면 총리도 좋은 수습책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줄 것을 요청했다. 곽상훈 민의원의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신문이나 풍문이 모두 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선동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방에 내려가보니 민심이 생각보다 악화돼 있었다”고 부산의 민심 동향을 소개했다. 모든 참석자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했으나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방법론에 서는 입을 다물었다. 경솔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현석호 국방부장관이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으니 그런 것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되겠는데 야당이 여당과 공동으로 법안을 제안하면 어떻겠는가?”라고 민감한 문제에 야당을 끌어들이려는 발언을 했다. 좋은 의미로 생각하면 중대한 시기에 여와 야가 공생공사하도록 협력하자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진산 간사장이 반론을 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법이라면 얼마든지 공동제안을 할 수 있지만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른 것은 기존 법으로도 얼마든지 경찰이 단속할 수 있을 것이고, 데모에 대해서도 정부가 확고하게 막아야겠다는 소신만 있으면 단독으로 법안을 제출하면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야당도 찬성하겠다”고 응수했다. 유진산 의원의 발언은 내각책임제에서 여당이 여당답게 책임을 지고 행동할 것을 촉구한 것으로 생각됐다.

 

지엽적 문제로 의견이 갈라지게 될 무렵 대통령은 “긴급한 사태를 수습할 방안이 없을 바에야 장면 총리는 거국내각을 만들어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단호하게 사태수습에 나서야 한다”고 문제해결의 핵심을 제안했다. 여기서 또다시 긴급조치권 발동문제가 제기됐는데 그동안 대통령은 ‘자문회의’를 통해 수차에 걸쳐 이 문제에 대한 논의와 검토를 거듭해왔던 것이다.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대해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무총리는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할 수 있다’는 헌법 제57조야말로 당시의 시국을 상정하고 만든 법률로 생각됐다.

 

“나보다 나은 사람 있나?”

 

데모를 방지하는 법이라든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을 만들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바에야, 또 막아야 할 확고한 소신만 있다면 긴급조치발동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긴급조치와 거국내각 구성에 대해서 장총리는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긴급조치가 장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으로 내심 오해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장총리는 “좀더 시간을 달라”고 그 자리를 모면하려 했고, 나중에는 “내가 만일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당장 어디에 있는가?”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당시 윤대통령은 장면 총리 말대로 총리를 바꾸어야 한다던가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총리 후보를 마음속에 생각한 바도 전혀 없었다.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장총리에게 힘을 실어주어 흐트러진 난국을 돌파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국내각을 하지 않고서는 집권당 단독으로 어떠한 법안도 국회에서 처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긴급조치권 발동 없이는 시각을 다투는 긴급현안을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장총리가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 데 대해 대통령은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대통령은 장총리에게 “다음 정국을 담당할 인물이 이보다 못할 바도 아니지만 지금 현상유지책만으로 안된다면 한번 바꿔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했다. 그뿐 아니라 대통령은 “민심의 80퍼센트가 현 정부를 지지하고 있지 않으니 장면정권이 물러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고까지 말하며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대통령 입에서 “장정권이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 곽상훈 민의원의장도 장내각 진퇴문제를 언급한 바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김도연 신민당 당수도 “정부가 시책을 강력히 수행할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날의 ‘최고지도자회의’는 ‘현 시국이 위기’라는 점에는 의견이 같았으나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결론을 못 내리고 끝이 났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회의 다음날 아침 일부 신문에는 ‘청와대는 정치 음모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 “그런 회의에는 다시는 안가겠다”는 장면 총리측의 반응이 실려 있었다. 5·16 쿠데타가 발생하기 바로 50일 전의 일이다.

 

청와대와 장내각 사이의 ‘협의관계’는 ‘최고지도자회의’가 마지막이었다. 대통령의 충정에서 나온 구국 노력은 본의 아니게 오해만 일으켰고 별다른 소득 없이 끝이 났다. 5·16은 다가오고만 있었다. 청와대는 속수무책이었다. 무너져가는 장내각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청와대는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5·16 쿠데타가 차츰 다가오고 있을 때 청와대는 풍문으로나마 쿠데타설을 전혀 모르고 있었나? 아니다. 여러 곳에서 그것도 쿠데타 핵심세력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전해듣고 있었다. 그러면 왜 사전에 쿠데타를 방지하지 못했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