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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식

결혼식
주례, 신랑-신부 이름 혼동… 식장 폭소 .
박정희는 새 장가를 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재물에 대해서 결벽증이 있는 그로서는 스스로 나서서 결혼경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형편이 었다. 어느날 박정희는 군수참모 김재춘 령에게 농반진반으로 말했다.

"김형, 이제 중신도 했으니 결혼도 시켜주어야지.".
그래 놓고는 한참 있다가 침울하게 말했다.

"김형, 그런데 나, 아무것도 없어."

"아, 예, 알겠습니다.".
김재춘은 풍족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다. 김재춘은 직속상관의 결혼에 필요한 돈을 모으면서 식장준비도 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생들도 김중령과 함께 결혼준비를 도와주었다. 교육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두용규와 이성조가 중심이 되어 청첩장, 예물준비, 식장물색에 나섰다.

뒤에 경북교육감을 지낸 이성조의 증언--.
"피란을 와서 고생하고 있는 정희를 돕자는 뜻에서 대구에 사는 동기생들은 거의 다 모였을 겁니다. 마침 은사 김영기 선생이 대구에 계셔서 축사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박정희와는 만난 적이 없지만 허억 대구시장을 주례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결혼식 날을 기다리던 육영수는 이즈음 재봉틀을 돌릴 때나 바느질을 할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뒤 육영수 집안에서 유명해진 그 노래의 가사는 이러했다.

'검푸른 숲속에서 맺은 꿈은 /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 이 가슴을 설레어라 / 첫 사랑의 노래랍니다 /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 나는 그대의 것이 되었답니다 /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니다'.

박정희는 육영수에게 결혼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는데 딸 재옥의 존재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육영수는 차마 아버지 육종관한테는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다. 치밀한 육종관은 박정희의 호적을 떼 보고는 더욱 거세게 딸을 말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경령, 육영수 두 모녀는 육종관으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지 못하니 이미 날을 받아놓은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며칠을 속으로 끙끙 앓고 있다가 어느 날 이경령 이 남편에게 넌지시 귀띔했다. 시인 박목월은 '육영수 여사'에서 그 직후에 있었던 부녀의 대화를 이렇게 재구성했다.

'"집안을 알아보았느냐."
"아뇨.".
"이 난리판에 군인에게 시집을 가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리냐."
"…."
"잘 생각해봐라.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그만두도록 해라.".
다소곳이 앉아서 듣고만 있던 작은 아씨가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군인으로 그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다 제 운명이라 생각하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겠어요.".
육종관은 딸을 설득할 수 없자 "너네 멋대로 해!"하고는 방을 나왔다.'.

그 며칠 뒤 송재천 중위가 군용트럭을 몰고 와서 이경령의 집 대문을 두드린다. 육영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모녀는 육종관한테 차마 결혼식을 올리러 간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육영수의 동생 예수가 나섰다. 아버지한테 다가갔다.

"예수야, 너도 네 언니 결혼식에 갈테야?" "그럼요, 언니 들러리를 서기로 했는 걸요." "너네 멋대로 해! 넌 오늘부터 내 딸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동생 육예수가 아버지 육종관으로부터 호통을 듣고나오자 육영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육종관은 대전으로 간다면서 집을 나가버렸다. 모녀는 대구로 떠나지 못하고 두 시간쯤 기다렸다.
육영수는 "인사만이라도 드리고 가야한다"고 마냥 기다리려고 했으나 예수는 "언니,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척 해버리는 것도 로맨틱하잖아"하면서 출발을 권했다. 어머니 이경령이 나섰다.
"너희 아버지가 언제 네 결혼 걱정하는 것 보았니. 어서 너희들이나 먼저 가라. 나는 내일 아버지 모시고 갈테니".

육영수, 예수 자매는 군용파커를 입고 송재천중위가 몰고온 트럭 짐칸에 타고 대구로 출발했다. 이날 집안에서 있었던 일로 해서 신경이 곤두섰던 육영수는 차안에서 심한 위경련을 겪었다.
예수가 언니의 배를 주물러주었지만 통증은 계속되었다. 밤 10시에 두 자매가 도착한 곳은 대구 삼덕동의 이정우 집 사랑채였다. 박정희 중령은 9사단 사령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오자 이 집을 얻어 두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육영수를 사랑채의 한 방에 눕혔지만 육영수는 그날밤을 딴 집에서 보냈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날,즉 1950년12월11일 육영수는 동생을 데리고 미장원에 갔다가 간밤의 고통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고 놀랐다. 예수는 "언니, 내일이 결혼식인데 어떡하지?"하고 울상이 되었다. 이날 오후 어머니 이경령이 혼자서 대구로 내려왔다.
전날 밤 늦게 돌아온 남편과 싸우고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점잖게 진행되었다고 전한다.
서로 옆방에 앉은 채로 한마디씩 주고받는 식이었다.
육종관이 자기 방에 앉아 "집안도 알아보지 않고 딸을 치우는 부모가 어딨나"라고 소리 치면 이경령은 안방에서 "영수가 그렇게 마음이 들어하는데도 가만 있으란 말이에요"라고 외친다.
남편이 소실을 다섯 명이나 집안에 들여도 순종하던 이경령으로서는 이런 '점잖은 싸움'도 대단한 도전이었다. 다음날 일찍 이경령이 대구로 출발할 때 이미 결심이 섰다.
이경령은 딸 편을 들기로 함으로써 육종관과 헤어지는 것이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사실상 별거상태로 들어가고만다. 육종관은 서울 사직동에 살던 큰 개성댁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이경령은 육영수와 함께 살게 된다.
순종적인 여성상의 전형처럼 보였던 이경령-육영수 모녀의 육종관에 대한 반란은 그들의 내면에 그동안 쌓여갔던, 바람피우는 남자에 대한 공통된 증오심이 공동전 선의 형식으로 발로된 때문이리라.
훗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친인척들의 집에 경찰관들을 배치하여 이권청탁 등 비행에 휘말리는 것을 감시케 했다. 서울에 살던 장인 집 앞에도 경찰이 진을 치자 육종관은 "사위놈이 날 감시하려는구나"하고 이경령이 자주 출입하는 친척집에 가서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내가 영수한테도 전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는데 여기 너희 외숙모(이 경령)가 자주 온다고 해서 찾아왔다. 내가 무슨 독립운동 하는 것도 아닌 데 형사들이 우리 집에 와 앉아 있으니 성가셔 죽겠다. 너희 외숙모한테 이야기 좀 전해라. 제발 형사들 좀 보내지 말라고.".

이 말이 박정희에게 전달되어 육종관에 대한 감시가 풀렸다고 한다.
박정희-육영수의 결혼식은 12월12일 오후 대구 계산동 천주교성당에서 열렸다.
박정희의 가족으로는 큰 형 박동희, 조카 박재석,박영옥이 참석 했다. 대구시장 허억이 주례석에 오르자 모닝 코트를 입은 박정희 중령이 독특한 걸음걸이로 입장했다.
육영수는 꽃바구니를 든 두 소녀를 앞세우고 박정희의 대구사범 은사 김영기선생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육영수의 들러리는 김재춘중령의 부인 장봉희와 육예수.
주례 허억은 신랑 신부와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주례사를 하면서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양은…"이라고 서두를 떼 장내는 웃음바다 가 되었다. 그러나 송재천은 얼굴이 하얘졌다. 송중위는 김재춘으로부터 신부용 금반지를 하나 사 갖고 있었다. 그는 반지갑이 너무 커서 반지만 꺼내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예물교환 시간에 맡추려고 반지를 찾으니 잡히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진 송재천은 김재춘한테 돈을 타서 뛰어나갔다. 금반지를 새로 구입하여 겨우 예물교환시간에 댈 수 있었다. 송중위가 나중에 차분히 반지를 찾아보니 시계 호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날 박정희의 은사 김영기는 이런 요지의 축사를 했다.

〈창천에 기러기 훨훨 날아가는 맑고 갠 오늘, 신랑 박정희군과 신부 육영수양은, 바라건대 세상은 회오리바람처럼 그칠 줄 모르니…신랑의 억 센 기품과 아름다운 신부의 온화함이 화합되어 서로 도와, 푸른 강가에 원앙새한 쌍 훨훨 날아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이 결혼식을 준비 하는 데 애썼던 대구사범 동기생 이성조의 회고--.

"하객은 비교적 많은 편이었지만 피로연은 조촐했지요. 전란중이라 뭐 가있었겠습니까.
동기생들이 밤새워 피로연을 준비했는데 성당 뒤편에 밤, 대추, 오징어로 한 상 차렸습니다. 순수한 우정으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이날 우리 동기생들은 다짐을 했어요. '박정희의 신혼생활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는말자'고 말입니다. 결혼식이 끝나자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각각의 삶속으로 돌아갔지요. 전쟁중에 모두가 갈 길이 바빴거든 요,".

박정희도 결혼식 다음날 사단사령부로 출근했다. '신혼여행'이란 개념이 생소하던 때였다. 박정희가 세든 사랑채는 방이 세 개였다. 큰 방은 박정희, 두번째 방은 이경령과 육영수-육예수, 세번째 방은 운전병과 부 관이 썼다.
이 집에는 부엌이 없었다. 육영수는 예수와 함께 현관을 부엌으로 개조하였다. 박정희는 퇴근하고 귀가하여 식사를 할 때는 주로 처제와 대화하는 편이었다. 그는 아내를 '영수'라고 불렀고 아내는 '여보세요' 라고 얼버무렸다. 박정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는 따뜻하게 데운 세숫 물을 대야에 받쳐 마루에 놓아두었다.
육영수는 머리를 곱게 빚고 엷은 화장도 했다. 육영수는 집안에서도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박정희로서는 처음으로 안락한 가정생활을 맛보게 된 것이다.

대구 삼덕동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닷새째 되던 날 박정희는 며칠전 이동한 9사단 사령부를 찾아 강원도로 향했다. 박정희 중령은 떠나 기전 돈을 봉투에 넣어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봉투 안에는 '가용비'라는 제목 아래 쌀값 얼마, 생활비 얼마 식으로 쓴 쪽지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다. 육영수는 나중에 청와대에서 이때를 회고하면서 "가계부를 열심히 적으면서 인편으로 오는 그분의 편지를 무척 기다렸으며, 하루빨리 평화가 와달라고 기도했답니다"라고 말했다.

< 자료등록일자 2003-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