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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충정아파트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우리가 사는 집, 집들이 모인 동네, 나아가 우리의 고향인 도시라는 공간에는 온갖 의미와 작동 원리가 숨어 있다. 사소한 것에서 중요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리드미컬하게 오가면서 쉽고 생생하.. 자세히보기

저자조한 | 출판사돌베개

 

충정아파트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 경계에 서다

 

1930년대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기로에 서 있다.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철거될 위기도 여전하다.
최초의 아파트가 가진 역사적, 건축적 의의를 무시하고 경제적 이익만 계산할 수도 없고, 대의를 외치며 주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수도 없다.
이 두 가지 당위의 경계에서 모두에게 좋은, 상생의 해답은 없는 걸까.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는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아파트 공화국』, 후마니타스, 2007)이라 불렀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끝없는 아파트의 물결이 서양인인 그녀에게는 충격이었나 보다. 20세기 초반 독일 근대 건축가 루트비히 힐버자이머(Ludwig Hilberseimer, 1885~1967)가 제안한, 끝없는 아파트로 채워져 있는, 공포스럽기까지 한 미래 도시의 모습을 우리나라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아파트의 해일도 작은 물결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그 물결이 시작된 최초의 아파트는 어디였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30년대 지어진 충정아파트가 최초의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그 건물은 아직도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250-6번지에 버티고 서 있다. 자료에 따르면 1933년 또는 1937년에 지어졌다고 하는데, 어림잡아 여든 살이나 된 아파트다. 신촌 쪽에서 충정로를 타고 광화문 쪽으로 가다 보면 5호선 충정로역 9번 출구를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5층짜리 녹색 건물이다. 보통 30년만 되어도 철거하고 새로 짓는 것이 풍토인 요즘 세상에 여든 살이나 되는 아파트가 대로변에 살아남아 있다니, 그것도 최초의 아파트가 아직도 버티고 서 있다니 놀랍기 짝이 없다.

 

하지만 오래된 시간의 향기를 기대하고 건물에 다가가 보면 정말 실망하게 된다. 건물 곳곳에 금이 가 있고,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가 하면, 부서진 창틀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건물은 정말 허름하기 그지없다. 조만간 철거되기 위해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건물의 모습 같다. 아무런 깊이도 없는 밋밋한 도로 쪽 입면에 창틀이 끼워져 있는 모습에서는 어떤 아름다움도 정성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든 살이나 되는 아파트가 잘 보이는 대로변에 살아남아 있다니, 그것도 최초의 아파트가 아직도 버티고 서 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충정아파트는 존재 자체가 놀라움이다.

 

그런데 북쪽으로 돌아가 보면, 전혀 다른 입면이 나온다. 층마다 창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가로로 긴 돌출된 콘크리트 프레임은 심지어 역동적인 움직임마저 느끼게 한다. 누군가 아름다운 비례와 수평적인 역동감을 입면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고민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서양 근대 건축사 책에서 본, 수평성이 강조된 데스틸(De Stijl) 양식의 건축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도로 쪽 잘 보이는 입면은 그토록 성의 없이 디자인해놓고, 옆면은 왜 그렇게 정성스럽게 디자인했을까. 궁금하던 차에 도로 쪽 입면과 옆 입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수평 창틀이 잘려나간 흔적이 보인다. 도대체 이 건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파트 입구에는 ‘충정아파트’가 무려 세 개나 있다. 출입문 위에 살짝 튀어나온 캐노피에는 오래된 붉은색 타일 위에 금속 ‘충정아파트’가, 문 바로 위 유리창에는 흰색 필름지 위에 새파란 ‘충정아파트’가, 문 옆에는 나무를 깎아 세로로 만든 ‘충정아파트’가 있다. 지난 80여 년의 역사가 입구 간판에서도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습하고, 오래된 건물 냄새와 함께 싱싱한 풀 냄새가 나고, 햇빛이 쏟아지는 중정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운데에는 거대한 굴뚝이 있고, 층층이 콘크리트 난간에는 햇빛을 머금은 화초가 가득하고, 그 위로는 마치 카페인 양 차양이 쳐져 있는가 하면, 창마다 다양한 색깔의 빨래가 걸려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가 마카오에 있는 어느 오래된 아파트에 있는 것인지, 영화에서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파리의 어느 아파트 중정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965년에 지어진 동대문 ‘연예인’ 아파트나, 1967년에 지어진 세운상가 아파트에서도 중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충정아파트가 그 원형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철골 보가 있는가 하면, 화장실이 실내가 아니라 외부 복도 옆에 붙어 있었다. 도로 쪽 세대 앞에는 중앙분리대가 있는 2차선 도로처럼 복도가 이중으로 붙어 있고, 중정 쪽으로 튀어나온 계단실 바로 옆에 또 다른 계단실이 붙어 있었다. 이렇게 작은 공간에 왜 계단이 두 개나 중복되어 있고, 복도는 또 왜 이중으로 만들어야 했을까. 복도와 복도를 통해 보는 건너편 복도는, 마치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가 그린 〈인간 조건〉(The Human Condition, 1933/1935)처럼,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어디가 안인지 어디가 밖인지, 내가 서 있는 곳이 안인지 밖인지 끊임없이 묻는 것 같았다. 서로 다른 시기에 지어진 듯한 복도와 계단들. 도대체 이 건물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거의 여든 살이 된 충정아파트는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파란만장한 주인공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며, 안타까운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지하 1층, 지상 4층, 연면적 3,471제곱미터(1,050평)의 콘크리트 구조로 지어진 충정아파트는 처음에는 건축가이자 건축주인 도요타 다네오(豊田種松)의 이름을 따서 ‘도요타 아파트’ 또는 한자 이름을 따서 ‘풍전(豊田)아파트’로 불렸다고 한다. 1930년대 주택난이 극심할 때 지어진 충정아파트는 세 개 동이 모여 만들어진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중정뿐 아니라, 거의 최초로 중앙난방 시설을 갖추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현재 중정에 남아 있는 거대한 굴뚝이 바로 그때 중앙난방의 흔적이다.

 

하지만 충정아파트의 화려한 시절은 광복과 뒤이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광복 직전 한 기업에 넘어가 호텔로 개조된 충정아파트는, 광복 후 귀국한 해외 동포에 의해 무단 점유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이 지하실에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트레머 호텔’이라는 유엔 전용 호텔로 사용되어, 주말마다 옥상에서 파티가 열렸다고 한다. 휴전 후에도 미국이 계속 점유하다가 1961년에야 한국 정부에 양도되었고,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김병조 씨에게 불하되었다. 건물의 명칭도 ‘코리아호텔’로 바뀌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여섯 아들이 모두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김병조 씨의 사연은 완전히 거짓말이었음이 들통 나고, 정부는 다시 건물을 몰수해버렸다. 이후에 몇 명의 건물주를 거치면서 호텔로도 운영되었지만, 결국 1975년에 건물 저당을 잡고 있던 서울은행에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은행에 저당을 잡히는 절박한 상황이, 아이러니하게도 건물을 다시 아파트로 되돌리게 하였다. 은행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주가 호텔을 아파트로 용도를 바꿔 개별 분양했고, 분양받은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은행과 협상을 벌여 다시 건물을 사들였다. 호텔로서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던 건물이 다시 아파트라는 삶의 터전으로 살아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4년 후인 1979년에 아파트를 통째로 갈기갈기 찢어놓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충정로 8차선 확장을 위해 건물 앞면이 헐려나간 것이다. 다른 쪽 입면과 다르게 충정로에 면한 입면이 밋밋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로 쪽에 살던 19세대가 3분의 1만 남기고 잘려나갔다. 건물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부도 잘려나간것이다.

 

도로 확장으로 인해 건물이 잘려나간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마치 꼬리가 잘려도 다시 자라는 도마뱀처럼 충정아파트 역시 잃었던 부분이 다시 자라났다. 하지만 밖이 아니라 안쪽으로 자란 것이 문제였다. 자기 집이 잘려나간 도로 쪽 세대들이 집 앞 복도를 전용한 것이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복도 앞에 복도와 계단을 새로 붙여야 했고, 그 결과 지금처럼 중정에 복도와 계단이 넘쳐나게 되었다. 충정아파트의 안과 밖을 보고 있으면, 우리 근현대 역사의 부글거리는 욕망과, 그 욕망으로 인해 생긴 수많은 상처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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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아파트는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며, 안타까운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80여 년간 버텨온 건물에 드디어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2008년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된 것이다. 여든 살이나 된 충정아파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별 어려움 없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가 신축될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지난 80여 년간의 얽힌 욕망과 상처가 아이러니하게도 충정아파트가 사라지는 것을 막고 있다. 원래 주거 면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안쪽 세대와 도로 확장으로 인해 주거 면적을 잃은 세대 간의 갈등뿐 아니라, 코리아호텔 시절 불법 증축한 5층에 살고 있는 세대와 나머지 층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인해, 보상 대상과 보상금에 대한 주민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4층 이하 세대들은 ‘5층 세대들에게는 토지 지분이 없다’며 보상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개발이 지지부진하자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충정아파트를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를 등록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등록문화재란 지정문화재(국보 · 보물 · 중요무형문화재 · 사적 · 명승 등)가 아닌 문화재 중 건설 · 제작 · 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각 분야에서 기념이 되거나 상징적 가치가 있는 것이나 지역의 역사 · 문화적 배경이 되고 있으며, 그 가치가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것, 기술 발전 또는 예술적 사조 등 그 시대를 반영하거나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근대화 이후부터 1960년대 전후까지 근대 문화유산 중 보존과 활용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등록문화재로는 제1호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한국전력 사옥 건물, 제2호인 종로구 화동에 있는 옛 경기고등학교 건물, 제11호인 태평로에 있는, 지금은 서울시의회로 활용하고 있는 옛 국회의사당, 제52호인 옛 서울시청 청사 등이 있다. 충청남도 청사(제18호)와 충청북도 청사 본관(제55호)도, 전남도청 본관(제16호), 이화여자대학교 파이퍼홀(제14호), 조선대학교 본관(제94호) 등도 등록문화재다.

 

충정아파트는 그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직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뭘까. 일본인이 짓고 소유했던 아파트이기 때문일까. 북한군에 의해 사용된 철원 노동당사(제22호)나 일본군에 의해 강제 노역으로 만들어진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제39호) 역시 등록문화재다. 그러니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등록문화재를 잘 살펴보면 학교나 청사, 성당, 은행 등 공공의 성격을 띤 건물이 많고, 원서동 고희동 가옥(제84호)이나 계동 배렴 가옥(제85호), 최근에 리모델링한 옛 보성여관(제132호) 등 주거나 숙박용 건물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대신 아파트나 공동주택은 발견하기 어렵다. 이유는 재산권 침해의 우려 때문이다.

 

개인 소유의 가옥과 달리 여러 가구가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나 공동주택은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그런 건물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긴 공동주택만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1987년에 철거된 화신백화점이나 2005년에 철거된 스카라 극장의 소유주는 자신의 건물이 역사적, 문화적으로 이슈화되기 시작하자,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을까봐 재빨리 건물을 철거해버렸다. 특히 복합상영관의 흐름 속에서도 홀로 단관 극장의 명맥을 유지해왔던 스카라 극장은 2005년 문화재청이 문화재 지정을 강행하려 하자, 건축주가 밤에 전격적으로 아름다운 전면부를 헐어내버리면서, 여든 살이나 된 극장이 허망하게 사라져버렸다.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지 못해 아쉬운 아파트는 더 있다. 1958년 성북동 산자락에 지어진 종암아파트는 광복 후 지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외부 공동 화장실을 사용하던 시절에 최초로 실내에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고, 침실에 온돌바닥이 있어 다른 방보다 바닥이 높았던 점도 특이한데, 이는 전통적인 좌식 공간에서 서양식 입식 공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주거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1993년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1995년에 지어진 종암선경아파트가 서 있다.

 

1962년부터 1964년까지 1, 2차로 나눠 지어진 마포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다. 당시 기와공장이 있던 마포형무소 농장 터에 지어진 마포아파트는 단지 내에 공원과 녹지 운동장을 갖춘 아파트로, 단지형 아파트의 선조격이다. 특히 1차분으로 지어진 여섯 개 동은 가운데 엘리베이터와 계단실 코어를 두고 세 갈래로 나눠지는 Y자형으로 지어져 형태적인 측면에서도 지금의 판상형 아파트나 타워형 아파트와 구분되는 독특한 건축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991년에 철거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1994년에 삼성아파트가 들어섰고, 흑백사진 속에서만 철거된 마포아파트의 독특한 형태를 볼 수 있다.

 

2010년에 대표적인 서울시 시범아파트 중 하나인 옥인시범아파트가 철거되는 등 우리 주거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아파트들이, 지난 20년 동안 단지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무참히 철거되었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근래 들어 근현대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래된 아파트 역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인기 버라이어티 방송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동대문 연예인 아파트와 세운상가 아파트, 1970년에 지어진 남산 회현 제2시민아파트를 다루면서,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던 옛날 아파트의 독특한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충정아파트는 입주자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당장 철거되는 위기는 모면했지만, 아직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 수 없는 상태다. 충정아파트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화재청이 충정아파트를 문화재로 등록하거나, 서울시가 매입하여 역사문화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자니 충정아파트가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점이 걸린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재산권이 침해당할 것을 우려하여 세간의 관심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으러 아파트에 들어가면, 주민들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의와 공공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충정아파트에는 그때의 상처가 건물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그 상처는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최초의 아파트가 가진 역사적 · 건축적 의의를 애써 망각하고 경제적 이득만 추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역사적 · 문화적 대의를 외치며 주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다. 개인의 삶을 존중해주는 것과, 그가 살고 있는 건물의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당위의 경계에서 양쪽 모두에게 좋은, 상생의 해답은 없는 걸까.

 

충정아파트를 빠져나와 큰길가 북쪽 모퉁이에 잠시 서 있으니, 골목길 안쪽 언덕 위에 독특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1967년에 건축가 김중업이 지은 프랑스 대사관이다. 노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대사관의 수려한 지붕 선에는, 현대적인 한국 건축의 해법을 찾기 위한 김중업의 숭고한 노력이 담겨 있다. 왼편에는 1996년에 완공된 지상 17층 지하 4층짜리 오피스가 서 있는데, 유리와 석재가 혼용된 깔끔한 커튼월 시스템은 1990년대의 전형적인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30년 터울로 지어진 아파트, 대사관, 오피스를 통해, 도시적 측면에서 건축 유형의 변화뿐 아니라, 건축 기술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있을까. 10년 후에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변화든, 충정아파트가 아흔 살을 맞이하는 10년 후, 충정아파트와 프랑스 대사관과 함께 또 다른 30년 터울의 변화를 목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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