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처럼… 교사처럼… ‘父傳女傳 용인술’ 보고싶다
기사입력 2013-02-02 03:00:00 기사수정 2013-02-02 10:08:22
朴당선인이 이어가야 할 ‘아버지의 리더십’ 5가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인사전략가’로 통한다. 10월 유신으로 독재 체제를 수립한 뒤 서서히 몰락의 길에 들어섰지만, 현재도 장단점을 깊이 따져보고 벤치마킹할 만한 특유의 용인술을 보여줬다.
○ 장수형 용인술
박 전 대통령은 현장 지휘관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되 전투 결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묻는 ‘장수형 용인술’을 폈다.
경제부총리제를 만들어 경제정책과 관련된 제반 권한을 보장했고, 국면전환용으로 부총리나 장관을 교체하는 일도 많지 않았다. 초대 경제부총리인 장기영 전 부총리는 3년 5개월 동안 재임하며 외자 도입을 주도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경제부총리 시절 최장수인 4년 3개월 동안 재임하며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밀고 나갔다.
차관 이하 인사권은 원칙적으로 장관에게 있었다. 대통령비서실에서 각 부처에 연락할 때도 국·실장이 아니라 장관에게만 연락하게 해 장관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그 대신 책임은 엄격하게 물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이끌며 ‘불도저’라는 별칭을 얻은 장 전 부총리였지만 삼성계열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처를 잘못하자 즉각 경질했다. 장·차관 공동운명제도 적용했다. 장관이 데리고 일할 사람으로 차관을 인선하게 한 만큼 차관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장관까지 함께 물러나게 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총리와 장관에게 헌법과 법률에 따른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경우 발표되자마자 ‘책임총리’로 적합한 인물이냐는 논란이 일었다. 추후 인선에서는 자율성을 갖고 권한과 책임을 행사할 수 있는 책임총리, 책임장관제에 적합한 인사를 기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통 큰 용인술
5대 대선 이틀 전인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는 당시 박정희 공화당 후보가 여수·순천사건 관련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실을 호외로 보도했다. 당시 사상 논쟁은 선거의 최대 쟁점이었던 만큼 그는 동아일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출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초대 국무총리로 최두선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임명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이 사례를 언급하며 “박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한마디로 폭이 넓었다”고 말했다. 필요하면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섰던 인사까지 과감히 발탁했다는 것.
이 전 의장은 예편한 이한림 장군을 1969년 건설부 장관에 임명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의 ‘통 큰 용인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했다.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1군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 개입 반대’를 외치며 혁명군을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 5·16 진압하려한 이한림 장군을 장관 임명 ‘통큰 인사’ ▼
능력만 있다면 지역적인 연고를 묻지 않고 요직에 기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전남 영광 출신의 박경원 2군사령관을 내무부 장관을 포함해 세 차례 장관으로 임명했다. 광주 출신인 정래혁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인사 대탕평’ 의지를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람이나 대표적인 탈박(脫朴) 인사로 분류됐던 김무성 전 의원을 중책에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5년의 정치 인생 동안 자신을 겨냥해 쓴소리를 하거나 불편한 관계를 겪은 인사들을 끌어안는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는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다.
○ CEO형 용인술
현장에서 실무를 관장하는 젊은 인재들을 눈여겨봤다가 직접 발탁하는 것도 ‘박정희 스타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몇 차례 걸러진 인사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은 “박 전 대통령은 농림부 농정국장, 내무부 지방국장, 재무부 이재국장 등 당시 주요 정부 부처 핵심 실·국장들의 정책 입안과 실행 역량을 관찰했다”고 전했다. 직접 불러 토론하고 과제를 내기도 했다.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재무부 차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 장관 등 ‘계단식 승진’의 대표적 사례. 1967년 12월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비 소요액을 산출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유류세 신설을 통한 재원 조달 방안까지 마련해 브리핑했다. 예상 밖의 보고에 흡족해한 박 전 대통령은 그때 김 고문을 낙점했다. 신년초도(新年初度) 순시나 국무회의도 실무 인재 발굴의 장으로 활용했다.
○ 교사 용인술
“OOO 귀하. 청와대 근무 10년의 노고와 그간의 업적을 높이 치하하며 앞으로도 방가(邦家·국가)를 위해 위국 대성 있기를 기원합니다. 대통령 박정희”
박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경북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 동안 교사생활을 한 경험을 살려 교사 같은 용인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손으로 눌러 쓴 친서를 통해 주위 공직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이 있음을 나타냈다.
박 전 대통령의 인사 수첩에는 사람에 대한 기록도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고 한다. 관직을 그만둔 인사에게 “1년 있다가 연락할 테니 좀 쉬고 있으라”고 한 뒤에는 정확히 1년 뒤 연락을 했다. 자리를 다시 주지 못하더라도 “그동안 낚시라도 하라”고 연락을 보내 잊혀진 존재가 아님을 각인시켰다.
실수나 뜻을 달리해 내친 사람에게 재기의 기회를 반드시 한 번은 줬다고 한다. 김용태 공화당 원내총무는 1967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가담해 출당 조치됐지만 1978년 무임소(無任所)장관(현 특임장관)에 복귀했다. 인력풀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치밀하게 관리해 대상 인물들이 자연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게 했다는 것.
박 당선인 특유의 정에 연연하지 않는 통치술은 장점이 많다. 하지만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박 당선인은 세심한 동시에 냉혹한 리더라는 평가도 나온다.
○ 균형 용인술
박 전 대통령은 측근끼리도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분리통치(divide and rule)’의 용인술을 구사했다. 유신 전에는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경쟁 구도를, 유신 후에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경쟁 구도를 유도했다. 10·26사태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권력 관리 의도가 깔려 있었다.
여기엔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세력을 만들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만큼 정권 내내 견제를 받았다.
‘2인자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 당선인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17년 동안의 청와대 생활을 거치면서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데다 ‘배신 트라우마’로 오히려 강화됐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민주화를 거치며 권력구조가 안정화된 만큼 박 전 대통령의 ‘균형 용인술’을 국정 운영의 효율성 측면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세중 전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현 시대정신 발행인)는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해 언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권력 관리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박 당선인은 그렇지 않은 만큼 총리나 장관에게 과감히 권한을 맡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수영·장원재 기자 gaea@donga.com
○ 장수형 용인술
경제부총리제를 만들어 경제정책과 관련된 제반 권한을 보장했고, 국면전환용으로 부총리나 장관을 교체하는 일도 많지 않았다. 초대 경제부총리인 장기영 전 부총리는 3년 5개월 동안 재임하며 외자 도입을 주도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는 경제부총리 시절 최장수인 4년 3개월 동안 재임하며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밀고 나갔다.
차관 이하 인사권은 원칙적으로 장관에게 있었다. 대통령비서실에서 각 부처에 연락할 때도 국·실장이 아니라 장관에게만 연락하게 해 장관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그 대신 책임은 엄격하게 물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이끌며 ‘불도저’라는 별칭을 얻은 장 전 부총리였지만 삼성계열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처를 잘못하자 즉각 경질했다. 장·차관 공동운명제도 적용했다. 장관이 데리고 일할 사람으로 차관을 인선하게 한 만큼 차관이 중대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장관까지 함께 물러나게 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총리와 장관에게 헌법과 법률에 따른 실질적 권한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경우 발표되자마자 ‘책임총리’로 적합한 인물이냐는 논란이 일었다. 추후 인선에서는 자율성을 갖고 권한과 책임을 행사할 수 있는 책임총리, 책임장관제에 적합한 인사를 기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통 큰 용인술
5대 대선 이틀 전인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는 당시 박정희 공화당 후보가 여수·순천사건 관련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실을 호외로 보도했다. 당시 사상 논쟁은 선거의 최대 쟁점이었던 만큼 그는 동아일보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표출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초대 국무총리로 최두선 당시 동아일보 사장을 임명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이 사례를 언급하며 “박 전 대통령의 용인술은 한마디로 폭이 넓었다”고 말했다. 필요하면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섰던 인사까지 과감히 발탁했다는 것.
이 전 의장은 예편한 이한림 장군을 1969년 건설부 장관에 임명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의 ‘통 큰 용인술’을 보여주는 사례로 거론했다. 그는 5·16군사정변 당시 1군사령관으로서 ‘군의 정치 개입 반대’를 외치며 혁명군을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 5·16 진압하려한 이한림 장군을 장관 임명 ‘통큰 인사’ ▼
능력만 있다면 지역적인 연고를 묻지 않고 요직에 기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전남 영광 출신의 박경원 2군사령관을 내무부 장관을 포함해 세 차례 장관으로 임명했다. 광주 출신인 정래혁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인사 대탕평’ 의지를 강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람이나 대표적인 탈박(脫朴) 인사로 분류됐던 김무성 전 의원을 중책에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15년의 정치 인생 동안 자신을 겨냥해 쓴소리를 하거나 불편한 관계를 겪은 인사들을 끌어안는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는 부족했다”는 평가도 있다.
○ CEO형 용인술
동훈 전 국토통일원 차관은 “박 전 대통령은 농림부 농정국장, 내무부 지방국장, 재무부 이재국장 등 당시 주요 정부 부처 핵심 실·국장들의 정책 입안과 실행 역량을 관찰했다”고 전했다. 직접 불러 토론하고 과제를 내기도 했다.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은 재무부 차관,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 장관 등 ‘계단식 승진’의 대표적 사례. 1967년 12월 재무부 이재국장 시절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비 소요액을 산출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유류세 신설을 통한 재원 조달 방안까지 마련해 브리핑했다. 예상 밖의 보고에 흡족해한 박 전 대통령은 그때 김 고문을 낙점했다. 신년초도(新年初度) 순시나 국무회의도 실무 인재 발굴의 장으로 활용했다.
○ 교사 용인술
“OOO 귀하. 청와대 근무 10년의 노고와 그간의 업적을 높이 치하하며 앞으로도 방가(邦家·국가)를 위해 위국 대성 있기를 기원합니다. 대통령 박정희”
박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으로 경북 문경보통학교에서 3년 동안 교사생활을 한 경험을 살려 교사 같은 용인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손으로 눌러 쓴 친서를 통해 주위 공직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이 있음을 나타냈다.
박 전 대통령의 인사 수첩에는 사람에 대한 기록도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고 한다. 관직을 그만둔 인사에게 “1년 있다가 연락할 테니 좀 쉬고 있으라”고 한 뒤에는 정확히 1년 뒤 연락을 했다. 자리를 다시 주지 못하더라도 “그동안 낚시라도 하라”고 연락을 보내 잊혀진 존재가 아님을 각인시켰다.
실수나 뜻을 달리해 내친 사람에게 재기의 기회를 반드시 한 번은 줬다고 한다. 김용태 공화당 원내총무는 1967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가담해 출당 조치됐지만 1978년 무임소(無任所)장관(현 특임장관)에 복귀했다. 인력풀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치밀하게 관리해 대상 인물들이 자연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없게 했다는 것.
박 당선인 특유의 정에 연연하지 않는 통치술은 장점이 많다. 하지만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들 사이에서도 박 당선인은 세심한 동시에 냉혹한 리더라는 평가도 나온다.
○ 균형 용인술
박 전 대통령은 측근끼리도 상호 견제하도록 하는 ‘분리통치(divide and rule)’의 용인술을 구사했다. 유신 전에는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경쟁 구도를, 유신 후에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경쟁 구도를 유도했다. 10·26사태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지만 힘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권력 관리 의도가 깔려 있었다.
여기엔 자신의 입지를 위협하는 세력을 만들지 않기 위한 측면도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던 만큼 정권 내내 견제를 받았다.
‘2인자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 당선인은 아버지를 빼닮았다. 17년 동안의 청와대 생활을 거치면서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데다 ‘배신 트라우마’로 오히려 강화됐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민주화를 거치며 권력구조가 안정화된 만큼 박 전 대통령의 ‘균형 용인술’을 국정 운영의 효율성 측면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세중 전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현 시대정신 발행인)는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집권해 언제 권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권력 관리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박 당선인은 그렇지 않은 만큼 총리나 장관에게 과감히 권한을 맡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수영·장원재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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