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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퇴임-동아일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매진하는

공무원들이 있기에 이 나라가 지탱하고 발전하고

다른 이들을 이끌고 경쟁을 느끼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진정으로 애국자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뭣하는가? 특히나 진보를 자처하는

야당들은 반미가 애국인 줄 아는가? 한심한 것들.

미국의 전쟁억지력이 아니면 우리가 경제발전에 전념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유무역협정은 피 할 수 없는 숙제였으며

일본 중국에 앞서서 체결한 것을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사건건 반대를 하나 이 미친 것들아.

경제를 살리라고 난리를 치면서 세계경제의 중심인

미국을 가까이 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논리의 일관성도 없고 이건 사춘기 청소년의 투정도 아니고

물정 모르는 아가들의 어리광에 다름 아니다.

타이름도 한계가 있다. 물 볼기를 쳐서 경계를 할 일이다.

사회 ‘FTA 검투사’ 김종훈 “이젠 손녀재롱 봐야죠”

기사입력 2011-12-31 03:00:00 기사수정 2011-12-31 03:00:00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 퇴임
美와 벼랑 끝 전술 등 화제… “암벽등반 등 취미도 즐길것”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주역인 ‘검투사’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59·사진)이 지난해 12월 30일 퇴임했다. 2007년 8월부터 4년 5개월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최장수 장관으로 이름을 올린 김 본부장은 이날 박태호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59)가 후임으로 내정됨에 따라 집무실을 비우게 됐다.

김 본부장은 한미 FTA 탄생의 주역이자 우리나라 통상정책의 산증인으로서 ‘박수’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2006년 4월 한미 FTA 협상 수석대표를 맡아 9차례의 끈질긴 협상을 주도한 끝에 이듬해 4월 극적인 타결을 이끌었다.

당시 집권당인 열린우리당과 언론은 그에게 ‘글래디에이터(검투사)’라는 별명을 붙여 영웅 대접을 하기도 했다. 그가 미국 측 협상 대표였던 웬디 커틀러 미무역대표부(USTR) 대표보에게 “우리는 전생에 검투사였을 거다. (검투사는) 죽기 아니면 살기이지만 당신과 나는 죽기 살기로 하면 안 된다. 너 살고 나 죽고 나 살고 너 죽으면 일이 될 수 없다”고 말한 이후부터다.

그는 미국과의 협상 당시 언쟁이나 벼랑 끝 전술을 피하지 않았고 귀가를 포기한 채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며 마라톤협상을 벌였다. 2007년 협상 때 갈아입을 옷을 전하려고 매일 찾아온 아내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얘기에서 결기를 느낄 수 있다. 당시 그는 “책임 있는 자리에 있을 때는 자유를 누릴 자유가 없다”며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난 뒤에는 자연과 가까이 하며 살 수 있는 시간을 꿈꾼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집권 이후 한미 FTA가 피지도 못하고 사장될 위기에 놓이자 ‘쉼표 하나 고칠 수 없다’고 버티다가 재협상에 나서기도 했다. 올 초 협정문의 번역 오류 문제가 불거지자 용퇴 의사를 밝혔지만 비준안까지 마무리하라는 청와대의 요청에 마음을 추슬렀다. 비준안 처리과정에서는 스스로 “참담한 심정”이라고 말할 정도로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4년여 전 협상타결 때 “미국과의 FTA는 불가피하다”며 격려했던 정동영 민주당 의원 등 비준안 반대파로부터 ‘매국노’ ‘이완용’이라는 소리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1월 22일 한미 FTA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김 본부장은 다시 ‘쉬고 싶다’는 의사를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물러날 준비를 했다. 대구 출신으로 경북대사대부고, 연세대를 졸업했으며 1974년 외무고시 8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미국 참사관, 국제경제국 심의관, 지역통상국장 등을 지냈다. 그는 며칠 전 모임에서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물러나면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손녀 재롱도 봐야 하고 더 늦기 전에 좋아하는 패러글라이딩과 암벽등반도 해야 하고 지금보다 더 바빠질걸요.”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