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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이런 짓을 한 놈이다.

아주 표현을 정중하고 감정 추스리고 하는 중인데

정말 열받네.

민노당과 진보신당(아직 그대로인가 모르겠지만)의 종북세력들은

도대체 새대가리(새가 기분 나빠하겠지만)들인지 아니면

정말 북으로부터 무슨 공작금을 받아 먹었는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간접적으로 세뇌가 된 건지 직접적으로 세뇌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닌 짓을 한 인간을 두고 함부로 찬양하는

주둥이를 놀릴 일이 아니다.

아무리 하늘이 없다고 믿는 나이지만 이 쯤 되면 당신들 머리 위로

벼락의 직격탄이 날아 내릴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를 옮겨 와 본다.

....................

[김정일 사망] 안으로는 경제파탄·인권유린… 밖으로는 테러·무력도발

  • 김민철 기자

  • 기사

    입력 : 2011.12.20 03:09

    악행으로 점철된 김정일 철권통치 37년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1974년 후계자로 공식화된 후 37년 동안 북한을 철권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북한 주민들은 경제적으로는 극심한 궁핍에 빠졌고, 기본적인 인권을 거론하는 것조차 사치일 정도로 철저한 강압 통치에 시달려야 했다. 김 위원장은 북한 주민은 물론, 남한의 동족을 향해서도 수많은 테러와 군사적 공격을 가했다.

    권력 과시형 경제운용… 굶어죽는 주민 속출

    김정일 위원장은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게 하는 등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시켰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이후 경제분야부터 손대기 시작했다. 당권 장악 차원에서 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에서 떼어내 당 산하로 옮겼다. 한편으론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던 당시의 경제침체 상황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권력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70일 전투' '속도전' 등 다양한 증산 캠페인과 무리한 대중동원 방식을 진행했다. 이런 경제운용은 경제논리를 철저히 무시한 것으로, 오늘날 북한 경제와 주민생활을 추락하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1994년 김일성 주석까지 사망하면서 북한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빠졌다. 1990년대 중반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됐다. 당시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북한은 말 그대로 생지옥으로 변했다.

    1991년 북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4.4%로 추락한 데 이어, 1992년에는 마이너스 7.1%를 기록하는 등 1998년까지 8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이 시기 부정부패도 만연하는 등 국가의 통제 기능이 완전히 마비됐다.

    북한 주민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0월 발표한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이 함께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주민 3명 중 1명꼴인 840만명이 영양부족 상태였다.

    先軍 내세운 폭압정치로 목숨 건 탈북자 양산

    북한이 만성적인 경제·식량난에 시달리면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 등으로 국경을 넘는 주민들이 줄을 이었다. 대북인권단체 '좋은벗들'은 1990년대 후반에만 30만명의 북한 주민이 탈북한 것으로 추산했다. 아직도 중국·러시아와 동남아 일대에 탈북자가 떠돌고, 생존을 위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많다.

    김 위원장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몇번 개혁 조치를 취하는 듯했으나 늘 구호에 그쳐 번번이 실패했다. 1998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의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고,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강성대국론' '신사고론' '실리주의' 등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북한을 실질적인 변화로 이끌지 못했다. 2009년 11월에는 기존 화폐와 새 화폐를 100대 1의 비율로 교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쌀값이 폭등세를 보여 주민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김 위원장은 군을 앞세우는 '선군(先軍)정치'를 국가 운영 시스템으로 내걸면서 극심한 경제난과 마이너스 성장에도 군사비 만은 지속적으로 증가시켰다. 김 위원장은 일상적으로 주민들을 감시·통제하고 억압해 나라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드는 등 인권을 유린했다. 통일연구원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숫자가 20여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고(故)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는 회고록에서 "수백만 인민을 굶겨 죽이고 자유와 평등을 빼앗아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든 사람을 어떻게 인민의 지도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육영수여사 저격·아웅산 폭파 등 정치 테러

    김정일이 1974년 2월 김일성의 후계자로 등장한 뒤 북한은 한국 정부 최고위부를 향해 직접테러 공격을 저질렀다. 첫 대형 테러는 육영수 여사 저격이었다. 1974년 8·15 경축 행사장에서 김일성 부자(父子)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 여사 저격을 시도했다. 박 대통령은 무사했으나 육 여사는 범인의 총탄을 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1983년 10월 9일에는 미얀마(당시엔 버마)의 양곤에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을 겨냥했다. 김정일의 친필 서신을 받은 북한군 진용진 소좌와 강민철·신기철 대위 등이 당시 아웅산 묘소를 참배 중이던 전 대통령 일행을 상대로 강력한 폭탄을 터뜨렸다. 전 대통령은 살아남았지만 장관·청와대수석 등 정부 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은 중경상을 입었다.

    두 사건은 북한의 대표적 '정치적' 테러였다. 이후에도 북한은 해외 공관 등에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을 지속적으로 노려왔다.

    KAL기 폭파 등 민간인에까지 무차별 테러

    김정일은 '86서울아시안게임(1986년 9월 20일~10월 5일)'과 '88서울올림픽(1988년 9월 17일~10월 2일)'을 방해하기 위해 민간인에 대한 테러도 자행했다.

    1986년 9월 14일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김포공항 국제선청사 버스승차장 부근 자판기 옆 쓰레기통에 김일성 부자의 사주를 받은 국제 테러리스트가 TNT 폭약을 설치해 폭파했다. 이 폭발로 5명이 죽고 30여명이 다쳤다. 1987년 11월 29일에는 중동 근로자들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오던 KAL 858기를 폭발시켰다.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88서울올림픽 방해와 남한 내 분열을 조장하려는 차원이었다. 미국은 KAL 858기 테러를 계기로 북한을 2008년 10월까지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또한 김정일은 1997년 2월 15일 공작원 2명을 남파해 이한영(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을 살해했다. 1982년 한국으로 망명한 이한영에 대한 보복 차원이었다.

    핵실험 2차례 후 핵보유 선언… 전 세계 협박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 수백만의 아사자를 내면서도 일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 1차 북핵 위기를 조성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북한의 핵포기 대가로 경수로를 지어주는 제네바합의를 서명했으나, 김정일은 약속을 어기고 핵개발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2년 10월 농축우라늄프로그램이 발각돼 제2차 북핵 위기를 촉발했다.

    김정일은 "생존권을 위해 핵을 포기할 수 없다" "김일성 주석의 유훈대로 우리는 핵무기를 가질 의사가 없다" 등 상반된 듯한 의사표시를 하다가, 2006년 10월 9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지하 핵실험장에서 1차 핵실험을 했다. 그리고 약 3년 뒤인 2009년 5월 25일,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차 때보다 규모가 5배나 큰 2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핵개발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향한 협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부터 천안함까지 직접 도발

    1976년 8월 18일 북한군 병사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유엔군 초소 앞에서 시야 확보를 위해 나뭇가지를 치던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찍어 살해했다. 한·미 양국은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했고 결국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주석이 사과해야 했다.

    김정일이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명실공히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후엔 직접 도발이 더 많아졌다.

    1996년 9월엔 강릉에 잠수함과 무장공비 25명을 침투시켜 한국의 혼란을 유도했다. 1999년에는 북한 군함들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 해군 고속정에 포격을 가했으나 패퇴했다. 제1차 연평해전이었다. 김정일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한·일 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6월 29일, 다시 남측 함정들을 향해 기습 포격을 감행했다.

    작년 3월에는 남한 초계함 천안함에 어뢰를 발사, 우리 해군 장병 40여명을 수장시켰다. 11월에는 연평도에 포격을 가해 6·25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한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